한국에 처음 왔을 때 현장체험이라고 하면서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 그리고 가락시장을 보여주었다. 재래시장에 가보니 정말 남한 국민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남한국민들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일까?

많은 남한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의 게으름을 얘기하지만 시장에서는 북한 사람들도 남한사람 못지않게 열심히 일을 한다.

북한은 국가경제여서 모든 공장기업소가 다 국가의 소유였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개인에게 직접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거나 적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성실한 사람 몇몇을 빼놓고는 대부분 윗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일에서 빠질까, 그러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북한 영화에도 소개된 적이 있지만 ‘102삽’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앞장서서 일하는 척 하지만, 중간에는 슬쩍 빠져서 자기 볼일 보다가, 일이 거의 끝나갈 때 쯤 되돌아와서 마지막 한 삽을 더 뜨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는 놀면서 일을 가장 많이 한 것처럼 보이는 처세술에 대한 이야기는 이외에도 많다.

그래서 북한사람들은 대중 앞에서 너무 나서서 선동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영화 주인공을 빗대 ‘정순반장’이라고 비꼬며 왕따를 시키기도 했다.

아침 출근시간에도 일찍 나오는 사람보다는 시간 맞추어 나오는 것이 기본이다. 지각생이 너무 많아 회사 정문 앞에는 지각생을 단속하는 단속반이 서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간부직에 오르면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나 늦게 출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출근한 뒤에도 회사 일보다는 집안에 필요한 몇 가지 일을 보고는 일찍 집에 들어가거나 먹자판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국가가 배급을 주지 못하고, 공장에 일거리가 없어 일을 못하고, 월급은 밀리다 못해 아예 끊기자 사람들의 태도가 180도로 바뀌게 되었다. 각자가 식량휴가를 받아서 식량을 해결하든, 아니면 아침에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하루 종일 나가 장사를 하든,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내가 살았던 집은 장마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생계를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상황이 되자 북한 주민들의 출퇴근 시간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벽 4~5시가 되면 일찍 장사 준비를 해서 장마당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행렬로 길이 미어터졌다. 저녁에도 할 수만 있다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 캄캄할 때까지 장마당 바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평양의 어느 한 장마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는 장마당 초기여서 자리가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을 때인데, 어떤 사람이 좋은 자리를 얻으려고 새벽 5시에 장마당에 나왔는데 와서 보니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다음날은 아예 새벽 3시에 나왔는데 그때에도 장마당에는 빈 자리가 없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자기들은 장마당 자리를 빼앗길까봐 아예 장마당에서 떠나지 않고 밤을 샌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장마당이 형성되면서 북한 주민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장마당에는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없다. 주민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다니고 있고, 그만큼 돈이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장마당경제(북한식 자본주의)가 시작된 지 벌써 25년이 훨씬 넘었다. 북한의 장마당 경제만 제대로 살려도 북한주민들은 밥 먹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의 장마당경제를 제대로 살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정은이 앞으로도 계속 최고 존엄으로서 권위를 유지하고 싶다면 고민해야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탈북자를 처형하고,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식은 죽 먹듯 하면서 낄낄 댈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이런 욕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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