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성
/황해남도 재령 출생.
99년 입국해 현재 서울 양천고등학교 재학.

북한에서 만화영화를 보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 중에서도 조선중앙TV에서 몇 번이고 방영해 주었던 '소년장수'(1982~97년까지 50부작으로 제작-편집자)! 고구려의 소년장수 쇠매와 적장 호비와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몇 번씩 보아도 재미있었고, 그 속에 동화돼 버리곤 했다.

오후 5시 뉴스가 나간 뒤 시작되는 만화영화를 보자면 오전반 인민학생들은 문제가 없지만 오후반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어야 한다. 줄을 지어 집에 가는 날엔 못 보게 될까봐 학급 반장을 재촉하며 싸우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북한에는 집집마다 TV가 있는 것이 아니다. TV있는 집에는 아이들이 꽉 들어찬다.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오리(五里) 떨어진 친구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만화영화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온 정신을 집중한다. 소년장수가 고난을 받을 때는 같이 가슴을 조이고 눈물도 흘린다. 소년장수가 적들을 단번에 때려 눕히고, 나무를 베어내 혼자서 수많은 적들을 당해낼 때는 같이 환호하며 들뜬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

문제는 보는 도중 전기가 끊어질 때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무도 TV앞을 떠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냥 기다린다. "빨리 전기를 보내주세요" 속으로 이렇게 빌면서. 발을 구르며 우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의 하루 속에서 만화영화 '소년장수'는 놀이의 일부가 돼 버렸다. 아이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도 '소년장수'의 주제곡이다. 심지어 달려가는 모습도 이상하다. 입에서 말 발굽소리를 내며 말 달리듯 뛴다. 코트는 망토처럼 걸친 채 바람에 훨훨 날리며, 달리는 소년장수처럼 그렇게 뛰어간다. 길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있으면 그것은 채찍이 된다. 으랏차차 휘두르면 진짜 소년장수가 된 기분이다.

소품에도 관심이 많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졸라 소년장수 칼을 나무로 깎아 달라고도 하고, 고등중학교 형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들기도 한다. 파철로 칼을 갈아 허리에 꽂고 소년장수를 흉내내기도 한다. 소년장수처럼 높은 곳에서 나는 흉내를 내며 뛰어내리다 땅바닥에 엎어져 코가 깨지는가 하면, 머리가 터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악당 추장조차 인기가 있다. 어머니들은 "너 울면 추장놈이 잡으러 온다"고 해 아이들이 울음을 뚝 그치게 하는 데도 쓴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화제는 단연 '소년장수'다. 소년장수 쇠매가 추장과 결전을 하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이 날은 길거리에서 아이들 찾아보기가 어렵고, 다음 날 학교에서는 그 장면을 재현하느라 또 난장판이다.

한국에 와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소년장수'를 볼 수 있었다. 다시 보아도 그 때의 흥분이 되살아난다. '소년장수' 쇠매는 여전히 나의 영웅이다. 이제는 모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을 북한의 친구들도 아직 나와 같을지.

▶ 만화영화 '소년장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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