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팔로군 경력…김일성 정치적 입지 위협
낙동강 전투·평양 사수 실패 등 트집잡아 숙청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말 자강도 만포 별오리(현 장강군 향하리)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전쟁 개시이후 처음 열리는 당 전원회의였던 만큼 회의장은 자연스럽게 이때까지의 전쟁과정을 중간 결산하고 그 책임을 따지는 무대로 흘러갔다.

사흘 간 계속된 회의에서는 김일성과 박헌영 간에 패퇴의 책임소재를 둘러싸고 고성이 오가는 격렬한 공방이 벌어졌으며, 결국 2군단장 무정을 비롯한 몇몇 지휘관들이 군직을 박탈당하거나 책벌을 받는 선에서 일단 봉합됐다.

3차 전원회의의 최대 희생자가 된 무정은 김일성으로부터 군벌주의자, 도피주의자, 살인자라는 비판을 받고 군직을 박탈당한 뒤 숙청됐으며, 이후 재기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이듬해 여름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일찍이 서금(瑞金)에서 연안(延安)까지 2만5000리 장정(長程)에 참여한 유일한 한인 간부였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지냈으며, 중국내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집결체인 조선독립동맹의 무력인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지낸 화려한 경력과 명성에 비추어 보면 초라하고 허무한 최후였다.

무정이 심한 비판을 받고 숙청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했다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지휘계통을 수시로 무시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사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데다 압록강 건너 만주까지 후퇴했으며, 감정에 치우쳐 야전병원 의사를 자의로 사살했다는 것 등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상황에서 주어진 평양사수 명령은 누구도 감당키 어려운 임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정으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숙청 당한 이면에는 이런 표면적인 이유 외에 정치적인 변수가 작용하고 있었다. 무정은 1945년 11월 말 입북이후 남다른 정치적 야심을 불태우며 같은 연안파 거두인 김두봉이나 최창익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정치적 활로를 모색했고, 이런 그의 행동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던 김일성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실제로 무정은 광복 정국에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이력을 무색케 할 정도로 성가를 떨쳤고 그 때문에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 권력핵심에 진입하지 못한 채 한직을 맴돌았다.

중국군이 6·25전쟁에 참전해 인민군을 제치고 사실상 작전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도 김일성을 긴장시키는 요인이었다.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그들과 일정한 연고를 가지고 있던 연안파의 입지와 발언권이 강화됐으며, 더욱이 무정은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彭德懷)와는 팔로군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결국 무정의 실각에는 공식적으로 언급된 그의 「군사적 과오」 외에 정치적 역학관계가 민감하게 투영돼 있었으며 이것이 그의 정치생명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은 무정이 숙청당한 지 44년만인 1994년께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시신을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치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