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신념은 이민위천(以民爲天)이라고 역설하면서 인민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다고 자랑했다. 입만 열면 인민을 얘기했고 사람이 제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주체사상도 만들어 냈고 북한을 사람이 중심인 사회로 만들겠다고 염불처럼 외웠다.

그 감언이설에 속아 북한주민들은 생명도, 운명도, 미래도 모두 김일성 가문에 맡기고 노예가 됐다. 때가 되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누어주는 먹이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 감격의 눈물이 농도가 희석될까봐 정보를 차단하고 외부에 나가 보는 것은 고사하고 외부 소식을 듣는 것조차 철저히 막았다.

북한에서는 부득이해서 외국에 다녀오는 경우 직위고하에 막론하고 보위부에 불려가서 한 달 동안 고백서를 써야 한다. 최근에는 이산가족 상봉을 한 후에도 이런 고백서를 써도록 하고 있다. 외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보위부에 제출하고 그 모든 내용에 대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북한 실정이 어떻길래 이렇게 요란을 떨며 통제를 하는 것일까?

북한 엄마들은 배급소에 가서 배급을 받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특히 쌀이나 옥수수가 담긴 자루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자루에 그려진 짐승 머리 때문이다. 북한은 식량난을 대외적으로 인정하기 전에 식량이 많이 부족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외국에서 식량을 사오곤 했다. 그런데, 북한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싼 값에 식량을 사들이기 위해 동물 사료를 구입해 주민들에게 배급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먹으라고 나눠주는 쌀에 쓰레기가 태반이고 가끔은 썩은 냄새나 뜬 냄새, 쩐 냄새가 났다. 한 때는 현미쌀을 수입해 배급을 했는데 부패해서 누룩 냄새가 나는 이 쌀을 먹고 나면 설사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에서 판매하는 식량의 품질이 그런 것으로 착각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돼지머리, 소머리, 말머리들이 그려진 자루를 보고 우리가 먹는 쌀이 동물사료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 아이를 키우면서 동물 사료를 먹여야 하는 기막힌 현실에 북한 엄마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1996년 7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문화예술부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외사촌 오빠가 간만에 옥수수 10킬로그램을 배급받았다고 어깨가 으쓱해 있었다. 그런데 이 옥수수도 중국에서 사료로 수입해온 것이라 밥을 짓기 위해 선별을 하고 보니 40%가 쭉정이 등 쓰레기였다.

김일성,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에게 ‘인민 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말은 그럴 듯하게 했지만 한번도 북한주민들을 사람답게 대우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김정일은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폐플라스틱과 쓰레기 등을 가져다가 녹여 아이들의 책가방과 수도관 등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쓰레기를 가져다 녹여서인지 불투명한 갈색에 모양도 이상했던 이 책가방을 주민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아이들은 가방을 받고 ‘장군님 고맙습니다’를 목청껏 외쳐야 했다. 북한 주민들을 사람으로 대우한다면 가능했던 일일까 싶다.

북한은 1987년부터 식량 배급이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1992년에 아예 배급이 끊겼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5년 북한 당국은 대외적으로 식량난을 인정하게 해외에 원조를 요청하게 됐다. 지금도 배급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횟수는 미미하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대한민국 곳곳에서 ‘무상’을 공약하는 후보자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삶의 절반 이상을 북한에서 보내며 무상 배급을 받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상에는 늘 그만한 대가가 따라 다닌다.

대한민국에 와서 가장 좋았던 것은 적게 벌든 많이 벌든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사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적게 벌어도 아이들에게 동물사료를 사먹일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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