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문인들은 작품 발표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게 주어오고, 보이는 것을 보이게 받아왔다. 하필이면 문인들만이 그러했겠는가. 직업적 속성상 정신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거의가 그 범주에 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인들이 지금 한창 하고 있는 ‘북한 동포에게 겨울내복 보내기 운동’은 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무엇을 주고받는 조건거래형이 아니다. 북한 동포를 가깝고 먼 동네 사람들로 여기다가 바로 이웃이나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정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태 전 금강산길이 처음 열리고 첫 출항선이 뜰 때 승객의 한 사람으로 가서 금강산을 들락거리며 본 온정리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금강산은 설악산과 아래위 사이로 다 붙어 있지만 날씨만큼은 남북간에 뚜렷한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고, 그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 온정리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큰 것을 깨달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네가 썰렁하면 저네들은 으스스하겠다는 것이었다. 주리고 헐벗은 것이 흉이 아니었던 보릿고개 세대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보아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네들이 허용한다면 입고 있는 것이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주고 싶어한 것이 일행의 한결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들은 바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난은 그럭저럭 해결될 조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원찮은 공장 가동률로 미루어 보건대 의류난은 그 중에서도 겨울철의 내복난은 쉽게 풀릴 성 싶지가 않다.

우리는 먹고 입는 것으로 쪼들리는 집이 드문 데다 지구 온난화까지 북풍 한설을 누그러뜨려 주어 엄동설한에도 내복 덕으로 겨울을 나는 이가 거의 없는 셈이나 같다.

그러나 서울의 날씨가 0도일 때 중강진이 영하 17도라는 텔레비전의 일기예보를 보았던 지난 겨울철의 기억만 되살린다고 해도 북한 동포들이 겪지 않을 수 없는 겨우살이의 어려움쯤은 누구나 이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문인들이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북한 동포들에게 연말 선물로 겨울내복을 보내주기로 작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누구랄 것도 없이 삼복더위에 허덕거리고 있다. 긴 팔 소매만 봐도 답답한 이 삼복염천에 하물며 겨울내복 타령일 것이랴. 당연히 언뜻 이해가 아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백두산의 경우에 9월 15일부터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접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10월에 된서리가 내리고 11월에 눈발이 날리는 곳은 남한에도 적지가 않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북한 동포에게 겨울내복 보내기 운동을 하되 그 기한을 일단 8월 30일로 정한 것은 9월부터 선적해야 10월에는 동포들의 집에 전해져 내복에 담겨간 ‘따뜻한 가슴, 따뜻한 마음’의 우리 동포애를 피부로 느끼며 따뜻한 겨울을 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겨울내복 10만벌은 이천수백만 북한 동포를 헤아릴 적에 넉넉한 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문인들의 처지에서는 결코 만만치가 않은 양이다. 따라서 범문단적인 호응뿐 아니라 범국민적인 호응과 동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전만전하게 쓰고 버리는 것을 꼽으라면 아마 옷이 첫째로 꼽히지 않을까 싶다.

음식 쓰레기 다음으로 쌓이는 것도 한두 번 입고 버리는 의류 폐품일 것이다. 여기서 흔한 것이 저기서 귀한 것이 된다면, 흔한 것을 아껴 귀한 것으로 바꾸는 알뜰한 솜씨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이열치열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따뜻한 마음씨 하나면 이 삼복더위도 시원스럽게 보낼 수가 있을 것이다.

/ 이문구 소설가·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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