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玄浩

국가정보원(국정원)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지금 국정원은 아무래도 정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갖가지 「게이트」에 국정원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해 내부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난 후 직원들의 입에서는 『사람 만나기 창피하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벤처기업 비리에 국정원 직원이 연루된 케이스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어 그 뿌리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최근에는 재탈북자 사건 처리마저 매끄럽지 못해 구설수에 올랐다. 게다가 사건에 연루된 간부들은 하나같이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사망한 동료에게 책임을 미루는 모습을 보여 정보기관 특유의 「조직에 대한 충성」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사정이 이러니 『국정원이 국민들의 경멸의 대상이 됐다』거나 『선배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마저 사라졌다』는 직원들의 푸념이 예사롭지 않다. 정보기관은 음지에 있기 때문에 명예와 긍지로 산다. 구소련의 KGB나 동독의 슈타지(Stasi)는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도 나름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고 한다.

제대로 된 나라의 정보기관 치고 지금의 국정원처럼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권위를 잃어버린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어쩌다 국정원이 이렇게 됐는가. 국정원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가장 큰 이유로 현 정권 들어 이루어진 특정지역 출신 우대의 내부 인사를 꼽는 데 별로 주저하지 않는다.

특정지역 출신 간의 사적(私的) 연대감은 내부의 자체 정화(淨化) 기능을 약화시켜 각종 비리를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직으로 밀리거나 해직당한 사람들이 소송까지 제기했다. 정보기관 직원들이 해직당했다고 소송을 제기할 정도라면 내부기강이 어떤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같은 인사 불균형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이 지난 연말 인사 등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미봉책에 그쳤다는 것이 내부사람들의 평가다.

현 정권의 대북 햇볕정책이 국정원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다는 지적도 있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이 결정되기보다는 정해진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보 짜맞추기가 우선시되는 내부풍토라는 얘기들이다.

일선에서 수집한 북한관련 정보가 햇볕정책과 배치될 경우 무시되거나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잦다 보니 실무자들부터 윗사람의 구미에 맞는 정보를 찾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간첩 잡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버렸고 간첩신고 전화 「113」은 거의 무용지물이 됐다. 국정원이 우방국 정보기관들과 효율적인 정보공조를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라는 우려의 소리까지 들린다.

북한은 수십년간 집요하게 제기해 온 3대 대남 요구사항 중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는 지금도 고집하고 있지만 안기부(국정원) 해체는 현 정권 들어 슬그머니 빼버렸다. 북한이 국정원을 더이상 적대적으로 보지 않거나 아니면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고 여긴 때문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사정이 이런데도 국정원을 쇄신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상황이고 손을 대기도 이미 늦었다는 한탄과 함께 현 정부 임기가 끝나야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 국정원 주변에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안전을 지키는 중추기관을 1년 넘게 이 상태로 놓아두어도 괜찮을까.

이러다 대통령선거 때가 오면 국정원의 내부 파열음은 더욱 커지지 않겠는가. 그러한 진통이 국정원의 진정한 거듭남을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 아니겠느냐고 자위하고 있기에는 국정원이 국가안전을 위해 부여받고 있는 임무가 너무 중요하고, 거기에 투입되는 국민세금이 너무 막대하다.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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