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자주국방' 구호가 전국의 모든 담벼락을 장식하던 때가 있었다. 필자가 초중고를 다니던 1970년대다. 검은색 페인트로 굵게 찍은 네 글자는 멀리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 정부는 왜 그렇게 '자주국방'을 외쳤을까. 철이 들어 돌이켜보니, 그 시절 국가 지도자의 최대 고민은 바로 북한의 도발이었다.

1968년 초 서울 세검정 일대는 전장(戰場)으로 변했다. 북한 특수 게릴라부대 124군 병력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자하문 부근까지 접근해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다. 2년 뒤에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설치된 폭탄이 대통령의 목숨을 위협했다. 박 대통령은 1974년 8·15 기념식장에까지 잠입해온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총탄을 간신히 피했으나 육영수 여사를 잃고 말았다. 북한은 바다에서도 당포함 침몰사건, 해군 방송선 납치사건 등으로 한국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박 대통령의 '자주국방' 정책은 이러한 북한의 위협과 치욕적 패전에서 출발했다. 1970년 7월 미 닉슨 행정부의 7사단 철수 통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한 달 뒤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해 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무장하는 데 필요한 카빈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대전차 지뢰 등의 개발이 그때 시작됐다. 당시 군 장비 면에서 한국은 북한의 3분의 1 수준이었다고 오원철 전 수석비서관은 증언한다. 북한은 6·25전쟁 직후부터 군수산업에 총력을 기울여 각종 탄약과 대구경(大口徑) 화포, 심지어 잠수함과 함정까지 자체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자주국방' 구호가 나온 지 4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북한의 군사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0배에 달하는 경제 격차에도 불구하고 북핵 앞에서 군사력 열세는 더 커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60여년 동안 자숙하던 일본이 최근 본색을 드러내며 한국인을 모욕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침략과 여성 인권 말살의 역사를 부정하고 한국을 '어리석은 국가', 박 대통령 외교를 '고자질 외교'라며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역사에서 모든 치욕의 뿌리는 나약함이다. 김일성과 그의 아들·손자까지 한국을 우습게 아는 것은 한국이 무력 도발에 대응할 힘과 배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노골적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는 것은 한국의 군사력 수준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평가마저 부정하려는 '아시아의 말썽꾼'을 감싸안는 것도 신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의 아시아 이익 보호에 한국보다 일본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치욕을 당했으면서도 다음 치욕에 대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자주국방' 구호가 슬며시 사라진 뒤 '협력적 자주국방'이란 어색한 용어가 등장했다. 그 뒤 무슨 일만 터지면 '한·미 동맹'부터 찾는 것이 정부의 버릇이 되었다. 군인이 자신의 본분보다 승진에 더 신경 쓴다는 우려도 커졌다. 스물두 살 나이에 비통하게 어머니를 잃은 박근혜 대통령은 40년 전보다 훨씬 강화된 북한의 군사 위협을 상대해야 한다. 단군 이래 가장 잘 먹고 잘사는 지금, 국민을 설득해 아버지가 못다 이룬 '자주국방'을 실현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박 대통령 앞에 놓여 있다.

/프리미엄뉴스 지해범의 동서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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