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2월 태국 방콕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과학기술참사를 지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홍순경(76)씨. 총 5회로 나눠 정리한 홍씨의 탈출기 가운데 오늘이 그 마지막 이야기다.
지난 회에서 태국 정부의 보호 아래 들어간 홍씨 가족은 북송(北送) 위기에서 벗어난다. 홍씨는 한국 정부의 서울행 권유에도 미국 등 제3국 망명을 고집하는데…./편집자 주

태국-북한 간 지루한 공방 속에 서울서 온 ‘황장엽 편지’

태국을 벗어나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국제적으로 대망신을 당한 북한 측이 쉽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대사관 측은 우리를 북송하기 위해 끈질기게 태국 정부와 줄다리기를 하며 압력을 가했다. 그들의 유일한 주장이자 명분은 내게 뒤집어 씌운 범죄자라는 멍에였다. 초기 단계에서 위신이 크게 손상되기는 했지만, 북한은 내가 범죄자라는 거짓말을 줄기차게 반복했다.

태국 정부는 정면 대응 논리를 펼쳤다. 내가 범죄자라는 주장을 입증하라고 북한 측에 요구한 것이다.

홍순경씨와 황장엽씨(오른쪽). 현재 고인이 된 황씨는 북한을 탈출한 홍씨가 태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있었을 때 북한 민주화를 위해 함께 일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책 '만사일생' 중
홍순경씨와 황장엽씨(오른쪽). 현재 고인이 된 황씨는 북한을 탈출한 홍씨가 태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있었을 때 북한 민주화를 위해 함께 일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책 '만사일생' 중

그러는 사이, 한국 대사관의 면회 횟수가 늘어났다. 대한민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가 자주 제기되었다. 내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아서, 여전히 제3국을 고집했다. 잦은 권유에 자꾸 거절하는 것이 한편으로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한국 대사관에서 면회를 왔다고 해서 가족이 1층 면회실로 내려갔다. 방콕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나온 김내수 참사가 내 앞으로 편지를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든 편지 끝에는 황장엽이라는 수기가 적혀 있었다.

“홍 선생 가족이 북한을 탈출했다가 잡혔다가, 다시 무사히 탈출해서 태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소. 우리 말에 구사일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홍 선생의 경우는 만사일생이라 할 만하오. 나는 한국으로 넘어온 뒤에, 한국 정부와 협력하여 도탄에 빠진 북한 인민들을 구해내기 위한 통일운동에 매진하고 있소. 하루빨리 홍 선생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나와 함께 손잡고 통일운동에 나설 수 있기를 바라오.”

편지에는 황장엽 선생의 절절한 심경과 북한 동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황장엽 선생이 누구인가. 북한에서 주체철학의 이론적 토대를 정립한 대철학자 아니던가. 비록 그의 주체철학은 김부자의 유일수령독재체제를 수립하는데 악용되는 바람에 빛이 바랬지만, 북한 주민들 대다수는 그의 명성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국으로 망명했을 때에는 적지않은 술렁임이 일기도 했다.

내심 나는 크게 감동받았다. 사실 망명 이후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생각도 없었던 내게, 황장엽 선생의 심금을 울리는 편지는 커다란 감격과 감동 그 자체였다. 아내와 아들도 비슷한 심경이었던 듯하다.

미국선 망명거부… 너무 나 멀게 느껴진 노르웨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서는 우리의 행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국 대사관과 교섭했고, 현지의 미 대사관에서는 우리 가족을 받겠다고 승인해서 관련 보고 문건을 본국 국무부에 올려 보냈다고 들었다. 문건을 보냈다는 날로부터 약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유엔 판무관 담당자가 찾아왔다.

“미국 국무부에서는 홍순경 참사 가족의 망명 문제를 여러모로 신중하게 토의를 했으나 최종적으로 입국을 거절한다는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예? 미국 대사관에서 승인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최근 미국과 북한 관계가 좋은 흐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네 가족의 망명을 허용할 경우 예상되는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클린턴 정부 차원에서 내린 결정인 듯 합니다.”

그로부터 약 보름 만에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관계자가 다시 찾아와서 희소식을 전했다.
“노르웨이에서 당신네 가족의 망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멀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말을 다시 배워야한다는 것과 그 나라 문화를 다시 배워 익혀야 한다는 점이 아득히 멀게 느껴지고 부담으로 작용했다. 더우기 그 나라로 가면 나와 아내가 일을 하기 어렵고 아들이 일을 해서 부양해야 하므로, 아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러 각도에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미국은 우리를 거부했고, 우리를 받아들이겠다는 노르웨이는 우리에게 너무 멀었다.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홍순경씨(오른쪽)가 작년 7월 대통령직속 국민대통합위 위원으로 위촉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있다. /책 '만사일생' 중
홍순경씨(오른쪽)가 작년 7월 대통령직속 국민대통합위 위원으로 위촉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있다. /책 '만사일생' 중

결국 한국행 결심… 태국 정부도 홍씨 풀어주기로


1주일여를 고민하고 의논한 끝에 우리 가족은 한국행을 선택했다. 사실 한국행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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