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중·미 관계는 냉전 시기의 미·소 관계가 아니다. 서로 억제하고 반(反)억제하는 관계도 아니다.”

창완취안(常萬全) 중국 국방부장(장관)이 지난 4월 8일 베이징(北京) 창안제(長安街) 서쪽에 있는 8·1대루(八一大樓)에서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면서 한 말이다.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이 그렇게 전했다. 8·1대루는 중국 인민해방군 창군 기념일인 8월 1일을 기념해서 1999년에 지어진 당당한 모습의 12층 건물이다.

창완취안 국방부장은 미국의 전통적인 대(對)중국 정책 중의 하나인 ‘컨테인먼트 폴리시(containment policy·억제 정책)’를 의식해서 중국어 원어로는 ‘어쯔(?制·알제)와 판어쯔(反?制·반알제)’라는 용어를 썼다. ‘알(?)’은 ‘막는다’는 뜻으로 정확히 영어의 ‘contain’에 상응하는 용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에 대해 컨테인먼트와 인게이지먼트(engagement·‘개입’ 또는 ‘포용’의 뜻) 정책을 번갈아 구사해왔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후 많은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 투자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허용한 정책을 인게이지먼트 정책이라고 한다면, 지난 36년간의 빠른 경제발전을 통해 G2로 올라선 현재의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컨테인먼트 정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창완취안은 현재 중국이 일본, 필리핀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배경에는 더 이상의 중국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미국의 컨테인먼트 정책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헤이글 미 국방장관의 첫 중국 방문은 하와이에서 동남아시아 10개국 국방장관들과의 회동을 시작으로, 일본과 몽골을 방문하는 10일간의 동아시아 여행 일정의 일부로 계획됐다. 헤이글 국방장관의 여행 일정 자체가 중국 주변국을 잇달아 방문하는 컨테인먼트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창완취안 국방부장이 현재의 중국과 미국 관계를 ‘억제와 반억제’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한 데는 헤이글의 일정 자체에 대한 불만의 표출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헤이글 미 국방장관의 이번 중국 방문에 대해 미 국방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AFPS (American Forces Press Service·미군공보국)가 올려놓은 뉴스에 따르면, 헤이글은 신화통신이 전한 창완취안 국방부장의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현재 중국의 지위가 ‘강대국(major power)’이라는 사실은 이미 ‘굳어진(solidified)’ 것이다.”

중국의 지위를 ‘강대국’ 또는 ‘주요국’이라고 표현한 미 국방장관은 헤이글이 처음이다. 이전의 미군 당국자들은 중국을 ‘지역국가(regional power)’라고 표현해 왔다. “중국이 미국에 위협이 되느냐”라고 물으면, “중국이 위협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중국은 아직 지역국가로, 동북아 주변국들에 위협이 된다”라고 말해 왔다. 헤이글의 말은 ‘따라서 중국은 미국으로서 억제 정책을 써야 할 대상이 됐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창완취안은 그 나름대로 지금까지 중국 국방부장들이 하지 않던 말들을 헤이글에게 많이 쏟아놓았다. 창완취안은 현재의 중·일 갈등과 관련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겨냥해서 “중국 주변에는 요즘 확실히 튀는(挑事) 인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베 정권이 출범한 이후 일련의 잘못된 말과 행동(錯誤言行)을 해서 중·일 관계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엄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신화통신은 창완취안과 헤이글 간의 미·중 국방장관 회담에서 북한 문제에 관해 협의한 내용은 전하지 않았으나, 미 국방부 웹페이지에 실린 AFPS 통신 기사는 헤이글 장관이 판창룽(范長龍)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갈수록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점에 대해 논의했으며, “중국이 한반도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리기 불가능한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지속적으로 해줄 것”을 촉구했다고 전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1901년 미국, 영국, 러시아,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8개국 연합군이 5만의 군대로 베이징을 분할 점령한 역사로 시작한다. 당시의 역사는 지금도 베이징 북서쪽의 원명원(圓明園)에, 불타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함께 보존돼 있다. 미국과 중국 대륙의 관계는 1947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가 마오쩌둥(毛澤東)의 홍군(紅軍)에 패해 대만(臺灣)섬으로 탈출함으로써 끊어졌다.

그렇게 끊어졌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세기의 대화해(Rapprochement)’ 전략으로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끄는 중국 지도부와 비밀 회담을 함으로써 다시 이어졌다. 당시의 비밀접촉은 1972년 2월의 닉슨 방중으로 공개되고, 상하이에서 합의한 상하이 커뮤니케로 마무리됐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20세기 들어와서 1947년부터 25년 동안 끊어져 있다가 1972년에 회복됐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지휘에 따라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빠른 경제발전을 시작한 중국은 36년 만에 G2로 일어섰다. 미국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키 155㎝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태평양을 건너가 미국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미국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자신의 왼팔 자오쯔양(趙紫陽) 중국공산당 총서기에게 이른바 ‘인민복’으로 알려진 ‘중산복(中山服)’ 대신 양복을 입고 미국 여행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중국에 대한 ‘인게이지먼트’ 전략에 나선 미국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했다. 물론 그런 전략은 미국과 소련, 중국의 삼각관계에서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채택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어 이제는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그 사이에 새로 일어서고 있는 러시아가 끼어있는 형국이다. 창완취안이 헤이글에게 말한 ‘지금의 중·미 관계는 냉전 시기의 미·소 관계가 아니다’라는 말은 그런 삼각관계의 역사를 가리켜서 한 말이다.

우리는 1971년에 시작된 미·중 비밀접촉을 당시에는 몰랐다. 닉슨으로부터 비밀접촉을 통보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미·중 화해를 알게 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배신감에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다. 그 시도는 돌연한 김재규의 시해(弑害)로 중단됐고,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포기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92년 한·중 수교로 중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서 현재 우리와 미국, 중국을 괴롭히고 있다. 지난 4월 8일 있었던 창완취안 중국 국방부장과 헤이글 미 국방장관의 회담 때 주고받은 말들은 두 나라의 과거를 되돌아볼 때 말 그대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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