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김일성에 대하여

한강서 머뭇거리다 미군 상륙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침을 시도한 김일성의 군대가 서울을 수중에 넣은 때는 1950년 6월 28일이다. 인민군의 주력이 서울 시내에 들어왔고, 대한민국 국군 지도부는 이미 한강을 거쳐 수원으로 밀려 내려가 있었다. 북한 인민군은 이로부터 짧게는 나흘을 서울에서 지체했다. 그들이 한강을 넘어 수원을 공격한 때는 7월4일 아침이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김일성의 군대는 서울에서 머뭇거리다가 한강을 넘지 못해 결국 약 1주일가량을 지체하면서 시간상의 불리함을 자초해야 했다. 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했다. 여러 증언과 역사 연구가 밝히고 있듯이, 당시의 국군은 전력이나 전술 운용 등 모든 면에서 김일성의 군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울을 내주는 과정에서 급히 한강 인도교를 끊는 바람에 한강 이북의 국군 1사단 등 보유 전력을 철수하지 못해 손실이 아주 컸다.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나이 어린 소년도 많이 섞여 있었다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나이 어린 소년도 많이 섞여 있었다

김일성이 서울 점령에 이어 당초의 기세대로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면 상황은 대한민국에게 아주 불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행이랄까, 김일성은 결국 거기서 주춤거리고 말았다. 그가 왜 한강을 신속하게 넘지 못했는지에 관한 진정한 이유는 학자들의 연구 등을 통해 더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어쨌든 김일성의 머뭇거림은 국군에게는 아주 다행이었다. 국군은 시흥사령부 사령관 김홍일 장군의 지휘 아래 튼튼한 한강방어선을 구축한 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더 큰 변화가 있었다. 국군이 신속하게 재편에 착수했다는 점,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미군 전력의 희생 가능성을 알면서도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한국 전선에 급파(急派)했다는 점이다.

국군은 개전 초 8개 사단이었으나 이미 3개 사단 병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국군은 제1군단을 평택에서 창설한 뒤 막 도착한 미군에게 한반도 전선의 축선인 서부지역을 인계하고 중부전선으로 방어지역을 변경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주공(主攻)이 닥치고 있던 서부 축선은 일본에 주둔하다가 부산에 상륙한 미 24사단이 맡았다.

한반도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축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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