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1월 29일 북한 등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한 것이나, 최근 방한해서 한 발언은 김정일 정권의 본질에 관한 한국인들의 ‘기억’을 일깨웠다고 할 수 있다.

부시가 지적한 사실들, 김정일 정권이 주민들을 굶주림에 방치하면서도 대량살상무기를 계속 만들고 있다든가, 자유를 철저하게 억압하고 있다든가, 주민들의 진정한 의사를 대표하고 있지 못하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 보통의 한국민들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런 지적들은 '민족' '통일' '화해' 등의 구호나 가치들에 묻혀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고, 김정일 정권의 실체에 대한 인식은 무디어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시 발언의 시의성이나 표현의 적절성을 놓고는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가 북한 정권에 대화를 제의하면서도 "김정일 정권과 북한 주민들을 분리해 다루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것은 비외교적 언사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북한이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의 최고 수뇌부를 악랄하게 중상모독하는 망동"이라는 반응을 보인 것도 부시의 '북한 정권과 주민 분리'정책에 가장 반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부시의 이 같은 ‘비외교적’ 발언들이 당장은 한반도 긴장을 불러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87년 베를린을 방문,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향해『장벽을 당장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너무나 비외교적이었던 탓에 동서독 화해와 미·소 전략무기 감축 협상을 위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핵전쟁을 촉발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기우였다. 오히려 2년 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됐는데 이는 고르바초프가 레이건의 발언에서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읽고 개혁·개방을 가속화한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김정일도 고르바초프처럼 부시 발언을 계기로 개혁·개방을 추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이교관기자 haed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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