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2월 태국 방콕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과학기술참사를 지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홍순경(76)씨. 총 5회로 나눠 정리한 홍씨의 탈출기 가운데 오늘은 그 네번째 이야기다.

지난 회에서 홍씨는 태국 정부의 도움으로 북한 대사관에 감금돼있던 막내 아들을 극적으로 되찾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태국과 북한 간의 신경전, 해빙 모드에 들어간 미북(美北) 관계 등으로 인해 1년 8개월동안 태국을 떠나지 못하는데…. /편집자 주

北테러위협에 매일 잠자리 옮겨

태국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강경했다. 우리 가족을 체포하려고 평양에서 출장나온 국가보위부 대표단과 주변국들에서 입국한 보위부 요원들 4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태국 땅에서 행해진 그들의 기습 체포행위는 명백히 태국 국내법 위반이었다.

북한대사관은 비상이 걸렸다. 북한대사관측은 막후 교섭에 들어갔다. 일단 자수 형식으로 4명의 신병을 태국경찰에 인계한 후,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막대한 보석금을 내고 감옥행은 피하게 되었으나, 세계적인 망신거리가 된 것이다.

이러한 태국 정부의 조치들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그만큼 인권을 존중하고 자국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태국 정부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홍순경씨가 1997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과학기술 참사 시절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그는 "당시 북한 시각으론 남부럽지 않은 시절이었고, 대한민국 시각으론 속고살던 시절"이라고 했다. /책 '만사일생' 중
홍순경씨가 1997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과학기술 참사 시절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그는 "당시 북한 시각으론 남부럽지 않은 시절이었고, 대한민국 시각으론 속고살던 시절"이라고 했다. /책 '만사일생' 중

이후 우리에 대한 경찰의 보호가 강화됐다. 저녁마다 우리를 불러내 경찰 사무실 이곳저곳으로 매일 옮겨가면서 숙박하도록 안내해 주었다. 북한의 테러 위험 때문인 듯했다.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태국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해 얼마든지 테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우리는 매일 잠자리를 옮겨가면서 여러 사무실을 전전하며 자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궁지에 몰린 北, 마지막 제안을 하다

북한 측에서 나에게 조건부 협조 요청을 했다. 그것은 보위부 요원들의 재판 회부와 유죄 판결을 회피하기 위해 북한대사관에서 내건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어느 날 태국 특수경찰청의 뜨리또뜨 부국장이 날 찾아와 면담을 했다. 그는 여러모로 우리 세 가족의 안전과 편의를 도와준 사람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뜨리또뜨는 북한 측 대표단 단장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다며, 면담 결과를 내게 이야기했다.

북한 측은 보위부 요원들이 재판을 받지 않고 태국에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도록 우리 가족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고, 그 대가로 우리가 체포될 당시 우리에게서 빼앗은 물건과 돈을 일부 돌려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우선 이해가 가지 않아 뜨리또뜨에게 물었다.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답은 범죄현장을 목격한 증인 자격으로 범죄 용의자를 식별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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