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정권에게 지금은 분명 대외적으로 위기의 시간이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북한 정권 스스로의 상황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에 달려있다. 지금까지는 김대중 정부와 국제사회가 북한을 달래고 바깥세상으로 끌어내기 위해 환경을 조성하고 여러 가지 유인책을 제공해 왔지만 이제 그 여지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북한 정권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달라진 국제정세의 흐름과 주변 여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속에서 생존전략을 새롭게 짜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 외무성의 22일 성명과 후속 반응들에서는 그러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북한식’ 대응으로는 지금 국제사회가 제기하고 있는 북한 정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북한은 외부의 식량지원 없이는 주민의 기본 식생활마저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사정이 어렵다. 더이상 ‘주체’와 ‘미제(美帝)타도’만 외쳐가지고서는 체제 존립이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싫든 좋든 국제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수용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고, 지금이 그것을 시험받는 중요한 순간인 것이다.

북한은 일단 미국이 제시한 ‘조건없는 대화’에 응할 필요가 있다. 조건이 없는 만큼 거기서 무슨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처럼 대화 재개 자체를 흥정의 대상으로 하는 전술은 더이상 미국에 통하기 어렵게 됐음을 알아야 한다. 북한은 한국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하나씩 쌓아가야 한다. 그것이 미국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도 초석이 될 것이다.

북한이 가장 피해야 할 일은 대북정책을 놓고 한국 내 일부에서 보이고 있는 반미감정을 한·미 공조 깨기에 이용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는 현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은 치명타를 맞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양상을 초래해 북한 정권에게도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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