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방한을 하루 앞둔 지난 18일 서울 삼성동 미국상공회의소(AMCHAM)를 점거한 한총련 대학생 등 28명에 대한 경찰조사 과정에서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여러차례 벌어졌다.

이들이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경찰은 조사시간의 대부분을 신원 파악에 썼다. 갖고 있던 휴대전화 등을 통해 일부 학생들의 신원은 간접적으로 확인했지만 직업운동권으로 보이는 30~40대 남녀 3명은 끝내 누구인지조차 몰라 구속영장에 이름 대신 ’30대 체크무늬 상의 남자’라고 쓰는 촌극(寸劇)이 벌어졌다.
영장청구시한인 ‘체포 후 48시간’이 다가오자 경찰은 이들에게 “제발 이름 석자만 가르쳐달라”고 사정까지 했다. 그에 앞서 지문을 채취하려 했지만 주먹을 펴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실패했다. 거세게 추궁하면 책상에 머리를 찧는 ‘자해행위’로 저항한 피의자도 있었다고 한다. 조사를 맡은 한 경찰관은 “솔직히 피의자들로부터 ‘협박’을 받는 기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리 현행범이라도 경찰이 과거처럼 강압적인 수사로 인권침해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 것 자체는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경찰의 조사 태도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공권력다운 당당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법에 규정된 권한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현행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은 현행범에 대해 지문을 채취해 ‘수사자료표’를 작성토록 돼 있다. 지문 채취는 피의자에게 「사정」이나 「호소」해서 하는 게 아니라 경찰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절차임에도 나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일관한 것이다.

경찰의 보신(保身)주의인지 말 못할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 申東昕·사회부기자 dh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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