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Photo: RFA
장진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Photo: RFA

내가 남한에 와서 첫 시집을 출간한 것은 2007년 3월이다. 300만 대량아사 현장을 고발한 시집이었는데 북한을 탈출할 때 유일하게 챙겨 온 나의 재산이었다. 당시는 북한과의 평화번영을 추구하는 노무현정부 시기라 나의 시집 출간 계획을 알게 된 직장 이사회에서 반대를 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까지 준비하는 시점에 공연히 북한을 자극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연구소 명의가 아닌 개인의 명의로 시집을 출간할 것이라고 단언했고, 그때부터 출판사를 찾아 다녔다. 처음엔 남한의 유명 출판사에 원고를 넣어보았다. 한 달을 기다렸다. 두 번 세 번의 재촉 끝에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는 허무한 빈 말 뿐이었다. 다른 출판사에서도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남한의 시들은 시인의 주관을 최대한 개성 있게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반면 나의 시는 독자와의 차별성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에게 더욱 접근하는 북한 식이어서 남한 시의 상식으로 봤을 때는 시가 아니라는 핀잔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시는 곧 개성이라면서도 너무 달라서 안 된다는 그 말처럼 틀린 지적이 없을 듯싶었다.

나는 독자에게 직접 호소하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에 시 몇 편을 올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다음이라는 포털 사이트의 동영상 부분에서 내 시가 한 주간 베스트 1위가 됐다. 어떤 대학생이 나의 시를 갖고 동영상을 만들었는데 인터넷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그 동영상에 붙은 댓 글들을 보며 집에서 혼자 엉엉 울었다. 북한 주민들의 슬픔과 고통을 자기 아픔처럼 동정해주고 눈물 흘려주는 인터넷 독자들의 그 여린 마음들의 댓 글 하나하나가 마치 절절한 시 한 편 한 편 같아서였다.

늘 나의 일상을 궁금해하고 조언해주시던 조갑제 선생님께 그 감동에 대해 말씀 드렸더니 자기도 원고를 한번 보자고 하시였다. 그 날 저녁 밤 늦게 나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조갑제선생의 흥분된 목소리였다. "빨리 출판하자, 왜 미리 나에게 이 원고에 대해 말을 안 했어," 나의 시집은 그렇게 되어 출판하게 됐다. 시집은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인터넷 서점인 인터파크에선 도서 판매 순위 1위가 됐고, 남한에서 가장 큰 대형서점인 교보문고에서도 2위가 됐다. 신문과 방송들에 시집의 대표시인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가 연이어 소개됐다.

그때부터 나는 '얼굴 없는 탈북 시인'이 됐다. 직장에서 언론과 절대 인터뷰를 해선 안 된다는 내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 얼굴이 노출되면 북한에 계시는 가족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본명이 아닌 장진성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됐다. 북한 같으면 개인창작이란 말조차 용납되지 않고, 또 김정일의 사인을 받아야만 개인시집을 낼 수 있을 만큼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남한에선 우연의 기회가 만들어 준 시집이어서 나는 한 동안 현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그 못지 않게 나를 더 당황하게 한 것은 내 시집에 대한 엇갈린 해석들이었다. 보수 쪽에서는 300만 대량아사의 비극을 만든 북한 정권 시스템의 문제로 본 반면, 좌익 쪽에서는 기아를 물질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인도주의 시집으로 평가했다. 그 둘 중 어느 쪽인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나는 "300만 아사는 쌀이 없어서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인권이 없어서 죽은 것이다. 나의 시집은 인권 시집이다"라고 말했다. 그 인권시집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모든 분께 나는 지금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출처 - 자유아시아방송 장진성∙탈북 작가 <<장진성의 못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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