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기 위해 오대양호 타며 '생이별'했던 형 42년만에 재회
북측의 이복동생들에게 아버지 생전 모습 전해듣기도

41년 전 납북됐던 오대양호 선원들이 북한에서 찍은 단체사진.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대표 제공) 2013.8.23/뉴스1 © News1 김보영
41년 전 납북됐던 오대양호 선원들이 북한에서 찍은 단체사진.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대표 제공) 2013.8.23/뉴스1 © News1 김보영

이번 남북이산가족상봉에서 특히나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 북측 가족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6·25 당시 또는 그 이후 발생한 납북자들의 가족이다.

이들은 분단과 6·25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진 대부분의 이산가족들과 달리 가족들이 북측에 피랍되면서 가족들과 '생이별'했다.

이번 상봉엔 2명의 전후 납북자 가족과 3명의 전시 납북자가 북측의 가족을 만났다.

북한이 '납북'이라는 표헌 자체에 대해 민감한 것을 감안하면, 이번 상봉에서 그들의 만남은 더욱 애틋하고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번 상봉단 가운데 박양곤(52)씨는 1972년 서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오대양호'에 선원으로 탑승해 있다 납북됐던 형 박양수(58)씨와 형수 리순녀씨를 42년만에 만났다.

형님이 납북될 당시 동생 박씨는 국민학생(초등학생)이었다. 형님 양수씨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16살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오대양호를 탔다가 납북됐다.

박씨는 형님이 북한에서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약 12~13년 전 우연히 알게됐다. 북측에서 남측으로 내려온 한 탈북자를 통해 형님이 생존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이후 형님을 생전에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박씨는 이번 이산상봉전 취재진과 미리 만났던 자리에서 "처음 납북됐을 때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들 이야기했다"며 "생사확인이 안되니 기일도 알수 없었다. 묵묵부답으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그간의 마음 고생을 털어놓았다.

박씨는 "권력이라든지 경제력이 없어 생사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그 고충이야 이루말할 수 없지"라고 말했다.

1974년 2월 백령도 인근에서 홍어잡이 배를 탔다가 북한 해군의 함포 공격을 받고 납북되며, 40년동안 헤어졌던 형제도 이날 눈물로 상봉했다.

당시 스물한살이었던 최영철씨(61)는 당시 고등학교 진학이 힘들어 돈을 벌기 위해 어선을 탔다가, 북측으로 끌려갔다.

최씨를 만나기 위해 이날 금강산을 찾은 형 최선득(71)씨는 상봉 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동생) 딴에는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학교를 갈 생각도 했던 것 같기도 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최씨는 이날 동생에게 '태엽시계'를 선물했다. 금강산에 오기 전에 가족들과 '디지털 시계'를 할지 배터리 시계를 할지 고민하다가 북측에 배터리가 없겠다 싶어 태엽시계를 들고왔다.

이밖에 정부로부터 전시납북자로 인정된 북측의 최종석(93)씨와 최흥식(87)씨도 이번 상봉대상에 포함됐었지만, 모두 사망한 것으로 확인돼 남측의 아들, 딸인 최남순(65)씨와 아들 최병관(68)씨가 북측의 이복동생들을 만나 생전 아버지의 모습을 전해들었다.

최남순씨는 북측에 이복동생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처음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을 것 같고, 아버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날 이복 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밖에 6·25 당시 아버지가 북으로 끌려갔던 임태호(68)씨도 이날 사망한 아버지 대신에 생면부지의 북측 이복형제들과 만났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