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하루 앞둔 19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산가족들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있었다.

"금강산에 가려고 어제 퇴원했어. 내일 동생들 만난다니깐 아픈 줄도 모르겠어. 눈이 많이 내렸다던데, 걱정이야."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최정호(91) 할머니는 휴전선을 건너기에 앞서 하늘만 바라봤다고 한다. 기상관측 이래 최장기간이라는 폭설이 혈육들을 만나러 가는 길을 가로막을까봐 두려워서다.

최 할머니의 금강산 행은 하마터면 불발될 뻔했다. 지난달 11일 밤 9시께 교회를 가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고령의 어머니를 염려한 가족들은 극구 만류했다. 자칫 이산가족상봉은 고사하고 초상을 치를 판이었다.

할머니는 몸져누운 몸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의 모습을 천정에 그렸다. "이번에 만나지 못하면 언제 또 보게 될 지 장담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기어이 이산가족 상봉자 남측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빼지 않았다.

아프지만 신이 났단다. 성치 않은 몸으로 두 동생에게 건넬 선물을 직접 챙겼다.

최 할머니는 "(동생들에게 줄)옷이랑 양말 잔뜩 샀어. 입원하는 통에 내가 사러갈 수 없어 며느리가 고생을 많이 했지"라며 웃었다.

평안북도가 고향인 할머니가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휴전선 이남에서 보내 온 세월은 올해로 69년이다.

해방이 된지 닷새째인 1945년 8월20일 남쪽이 고향인 남편을 따라 내려왔다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친정길이 막혔다. 생이별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두 동생을 만나면 제일 먼저 묻고 싶어.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최 할머니는 북녘땅 어디엔가 잠들어있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한참을 흐느꼈다. 할머니는 "오늘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을 맺었다.

황덕용(83·경기도 평택시) 할아버지도 이번 금강산 행(行)에 합류했다.

황 할아버지는 상봉 가족들의 집결지인 강원도 속초에 늦지 않게 갈 요량으로 전날 노구를 이끌고 일찌감치 서울 서초동에 사는 큰 딸 희숙(54)씨 집을 찾았다.

희숙씨는 "연세가 많으신 데다 7년 전 허리 수술까지 받은 터라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힘들어 하신다"면서도 "그런데도 본인 약 보단 고모들에게 줄 보따리부터 챙기시더라. 몸은 아직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이미 북에 가 계시다"고 부친의 모습을 전했다.

황 할아버지도 최 할머니처럼 보따리를 챙겼다. 보따리 안에는 두 여동생에게 줄 옷과 목도리, 시계, 신발 등이 담겨있단다. 

 

 
 
강원도 속초가 집인 이명호(81) 할아버지는 60여년 만에 남동생을 만날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남편과 함께 상봉 행사에 가는 부인 한부덕(77)씨는 "기분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지만 서먹서먹할 것도 같다"며 "60년 넘도록 못 만났으니…"라고 말했다. 이제는 얼굴마저 희미해진 혈육과의 만남이 생경한 듯 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돌아가신 것조차 몰랐던 시부모님의 생전 얘기를 묻겠다고 하더라"며 직접 차를 몰고 이산가족 남쪽 출발지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내보였다.

황해도에서 1·4후퇴 때 내려온 강능환(92·서울 송파구) 할아버지 역시 상봉의 꿈을 이룬 83명 중 한 명이다. 60년 만에 북에 두고 온 아들을 만나게 된다.

강 할아버지는 "여기(남쪽)에 있는 아들과 같이 가게 됐다"며 "북에 있는 아들을 만나면 살아 있어줘서,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얘기한 뒤 안아 주겠다"고 말했다.

1·4후퇴 때 두 여동생과 헤어진 문정아(82) 할머니는 "나도 동생들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헤어질 당시) 동생들은 4살, 6살로 너무 어려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면서도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눌 생각"이라고 말했다. 문 할머니의 고향은 함경남도다.

최정호 할머니 등 남측 상봉 대상자 83명은 동반가족 61명과 함께 이날 오후 2시까지 강원도 속초 한화콘도에 집결한다.

이들은 신원 확인과 건강검진 절차를 거친 뒤 대한적십자사의 방북 교육을 받고 하룻밤을 보낸다.

이튿날인 20일 오전 9시께 숙소를 출발해 강원도 고성의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CIQ)에서 현대아산이 운영하는 버스로 갈아타고 오후 1시께 상봉 행사장인 금강산호텔에 도착한다.

오후 3시께 단체상봉을 시작으로 22일까지 북녘땅에 머물며 가족의 온기를 온몸으로 나눈다.

태반이 80세를 넘긴 상봉단은 북녘땅에서 2박3일의 일정을 보낸다. 반세기가 넘는 긴 이산의 세월을 벌충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그래도 혈육을 만나러 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노구(老軀)'와는 상관없이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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