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수령님께서는…주체 34(1945)년 5월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공격작전계획을 세우시고 8월 9일 조선인민혁명군 전 부대에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공격명령을 내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총공격에로 넘어가 대일전쟁에 참가한 쏘련군대와 함께 일제의 100만 관동군을 일격에 소탕하고 드디여 주체 34(1945)년 8월 15일 력사적인 조국해방위업을 이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역사적인 순간을 기술한 북한 공식 출판물의 한 대목이다. 출판물의 내용으로만 보면 김일성은 광복과 함께 조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19일. 100만 관동군을 때려부실 만큼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들어 온 것이 아니라 50여 명의 인원과 함께 소련 군함을 타고 동해를 경유해 원산을 거쳐 입북했다.

김일성은 1930년대 만주일대에서 항일유격활동을 벌이다 일제의 대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하순 아무르강(江)을 건너 소련으로 도피했다. 그의 피신은 그가 소속돼 있던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에 사전 보고나 협의 없이 이루어진 개별적인 행동이었다.

소련으로 들어간 김일성과 유격대는 처음 한동안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남야영(南野營) 또는 B야영이라 부르는 곳에 머물다 42년 7월 하바로프스크 동북쪽의 북야영(北野營), 일명 A야영으로 옮겼다.

김일성과 일행은 북야영으로 옮긴 직후인 8월 1일 소련 극동방면군 산하 제88특별저격여단이 창설되자 이에 편입돼 광복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이들은 현지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대전에 참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광복의 그 날까지 대일전에 참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들어간 이후 두 번 정도 만주일대에 출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전투임무를 띤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이 일제의 패망소식을 듣고 북야영을 떠나 귀국 길에 오른 것은 1945년 9월 9일 경이다. 이들은 애초 육로를 이용해 귀국길에 올랐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북야영으로 되돌아간 뒤 보로쉴로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현지에서 소련군이 마련해준 군함을 타고 동해를 항해해 원산으로 입국했다.

김일성과 일행이 평양에 입성한 것은 9월 22. 그가 평양 시민들에게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10월 14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인민해방 축하대회'에서 '김일성장군'으로 등장해 연설하면서였다.

이때까지 그의 입북과 평양귀환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평양에서 은밀히 활동할 때도 김영환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심지어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조부모가 살아있던 만경대의 생가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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