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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준씨 일문일답 '국민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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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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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있는 아내를 데리러 갔다가 최근 재탈북한 유태준(34)씨는 17일 오후 서울 중랑구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거짓말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데 대해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회견 도중 아들(7) 얘기를 할 때나 회견을 곁에서 지켜보던 어머니 안정숙(60)씨를 보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다음은 유씨와의 일문일답.

--지금 심경은.

▲일이 이렇게 된데 대해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생지옥에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보살핌 탓이다. 이번 일을 통해 나라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죽더라도 여기에 뼈를 묻겠다. 언론이 어떤건지는 미처 몰랐다. 국가정보원에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괜찮을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새까만 칠, 파란 칠, 빨간 칠을 하는건 억울하다.

--왜 다시 북한으로 갔나.

▲아들 때문에 처를 데리러 간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만난 처는 처음부터 `간첩으로 (북한에) 온 것 아니냐'고 나를 추궁했고 다른 이들도 '남조선에는 여자가 없느냐'고 추궁했다.

--탈출 장소 등에 대해 왜 거짓말을 했나.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내가 북한에서 탈출한 곳은 겉으로는 식량분배를 하는 양정사업소지만 국가보위부 소속이고 지배인도 보위부원이었다. 25명의 무장한 보위부원이 번갈아가며 나를 감시했었다.

사업소에는 노동자가 20명 정도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 온 현미와 미국에서 온 밀, 그리고 벼가 담긴 가마를 기계 앞에까지 나르는 일을 했다. 작업장에 들어가면 밖에서 철문을 잠갔고 용변도 그 안에서 봐야 했다. 잠은 사업소 안에 있는 합숙소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잤다. 6명이 합숙소에서 잤는데 다른 이들은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점을 감안할 때 나를 감시하는 보위부원 같았다. 사업소에는 감시 망루가 있었고 담에는 가시철조망이 쳐져있었다. 다만 지난해 8월 기자회견 이후 사업소측과의 신경전을 통해 세번이나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이 (최종 탈출에) 도움이 됐다.

--감시를 받았다면서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나.

▲물론 뒤에 미행이 따라 붙었다. 한번은 오전 8시에 나가서 오후 5시까지 순천에 다녀왔다. 왕복 60㎞ 정도 거리를 걸어서 다녀왔는데 뒤에 미행이 따라붙긴 했지만 나를 붙들진 않았다. 아마도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는 것 같았다. 또 한번은 차를 타고 처가가 있는 함흥에 이틀동안 다녀온 적도 있었다. 미리 사업소측에 말을 했지만 허락은 받지 못했는데 그때에도 미행이 있었다. 그때에는 함흥역에서 붙들려서 돌아왔다. 마지막 탈출할 때에는 점심시간이었는데 정문 보초는 초소 안에 들어가 있었고 평성역은 감시가 심할 것 같아 순천역으로 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김정일의 지시가 있은 뒤로는 확실히 그전보다는 자유로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추궁도 당했고 실랑이도 있었지만...어쨌든 방침 덕을 본건 사실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친필 지시가 있었다는 얘기는 언제 들었나.

▲지난해 5월초에 양정사업소 노동과장과 함게 평성시 인민보안서에 가서 안전부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두사람이 '4.13 친필 방침'에 대한 얘기를 여러번 하는걸 들었다. 나오면서 노동과장한테 '김정일 위원장께서 당신을 풀어주라는 지시를 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초대소에서 부인과 합숙을 했다던데.

▲초대소라는 곳도 결코 호텔이 아니다. 초대소에 간지 5일 정도 지나서부터 처와 함께 지내게 됐다. 1차 기자회견 준비할 때에는 일주일정도 함께 있었고 2차 때에는 그보다 오래 있었다. 하지만 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엄격하게 나를 추궁하려고 했다. 무슨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중국 국경을 어떻게 넘었나.

▲순천역에서 기차 지붕위로 올라가 함북 길주 못미쳐서 업억역에서 내렸다. 머리 위로는 고압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역에 정차할 때마다 나를 잡으러 기차를 뒤졌고 몇번인가 지붕위로도 올라온 사람이 있었지만 들키진 않았다. 업억역에서 내린 다음 민가에서 인민군복을 훔쳐 입고 중국까지 나왔다.

--중국에서는 어떻게 바로 서울로 올 수 있었나.

▲중국으로 나온 뒤 한 교회에 머물렀으나 파룬궁 사건으로 교회에 대한 수색이 많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빨리 나왔다.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에서 붙들려 구류소에서 70일 정도 갇혀있었다. 탈북자들과 한방에 있었으나 나는 한국인이라고 우겼다. 중국과 한국간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중국에서 한국 당국의 조사를 받은 적은 없다.

--북한 실상은 어떻게 달라졌나.

▲98년 귀순 뒤 TV를 보면서 북한 상황이 조금쯤 나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가보니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것은 없었다. 청진 25교화소에 있을 때에는 하느님 얘기를 했다느니 탈옥 관련 물품이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내 앞에서 2명이 8발을 맞고 총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앞으로 계획은.

▲이번 일을 통해서 나라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 앞으로 자동차 정비를 배우고 싶다. 현재 결핵 증세가 있고 심장이 많이 약해졌다. 귀에서 고름이 나온다. 북한에 있을 때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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