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께서 그렇게 사랑해 주시던 똘똘이가 이제는 칠십 노인이 됐습니다. 어머니,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50년 전 헤어진 어머니 구인현(구인현·109)씨가 북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장이윤(장이윤·71·부산시 중구 영주동)씨는 “우리 나이로 올해 110살이나 되시는데 살아계신다니, 정말 믿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장씨는 27일 오후 부산 사하구 하단동 처조카가 운영하는 주방기기 제작공장에서 일을 돕다 어머니 생존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는 기자들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자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셨죠. ”

어머니는 마흔살 넘어 낳은 7남3녀의 막내이자 늦둥이였던 장씨를 유난히 귀여워 하셨다고 했다. “8살이 돼도 젖을 보채는 막내 때문에 어머니는 며느리 눈이 부끄러워 돌아서서 제게 젖을 물리시곤 하셨죠. ” 잠자리에 들 때면 머리맡에서 장화홍련전, 춘향전 같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머니는 고을 원님을 하던 할아버지가 “고르고 고른 며느리감”이라고 자랑할 만큼 미인이셨지만 홀로 10남매를 키울 만큼 강인한 분이었다. 장씨가 어머니와 헤어진 것은 평양서 생활하던 50년 12월. 어머니가 예순 되던 해였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평양에 진주했던 유엔군이 퇴각하며 ‘인민군 징집을 피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때 2살 위인 형 사택(사택)씨가 인민군 징집을 당했다. 막내마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잠시 피하라”며 눈물로 아들을 떠나보냈다. “저도 3~4일 뒤면 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살을 에는 대동강 물을 건넜습니다. ”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 영정 사진 한 장 없이 30년간 제사를 지내야 했던 비극의 시작이었다.

장씨는 “헤어질 때도 어머니는 치아가 좋지 않아 음식을 잘 못드셨어요. 북한이 식량사정이 안 좋아 고생 많으셨을텐데 지금까지 살아계신 게 믿어지지 않아요” 라며 눈물지었다. /부산=이길성기자 atticu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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