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는 지방선거와 월드컵, 두 큰 행사가 있다. 그리고 곧이어 6월 장마와 8월 태풍이 줄줄이 들이닥친다. 그러고 나면 어느 틈에 가을이 왔나 싶다가 이내 다시 대통령 선거가 휘몰아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4월이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확정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달쯤 뒤면 한나라당도 대통령 후보를 낸다.

이렇게 보면 김대중 대통령에게 남은 정치적 햇볕은 그야말로 한뼘쯤밖엔 안된다. 김 대통령이 진실로 이 점을 심각하게 받아 들인다면 그는 당장 오늘이라도 모든 「그래도 다시 한번」을 깨끗이 접어야 한다. 그래야 김 대통령은 국가지도자로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위와 명예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대통령 자신은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과욕할 생각이 없다. 이제는 마무리하겠다.』 그래서 필생의 숙원인 「통일 물꼬 트기」까지도 자신이 다하겠다는 생각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아, 김 대통령이 드디어 마음을 비웠나?』하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개각이 있었다. 최경원 법무장관을 「특정고 출신」이라서인지 말도 안되게 목치더니, 한번 물러났던 측근을 덜컥 도로 데려갔다. 그래서 숱한 수군거림과 의심의 암괴가 또 한차례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흥, 그러면 그렇지. 김 대통령은 최후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타입이야….』 『그걸 또 믿은 내가 잘못이지….』

그러다가 또 헷갈림을 느낄 수밖에 없는 파동이 왔다. 바로 부시의 「악의 축」발언이었다. 부시 발언은 이제와서 보면 북한에 대한 대화거부나 선전포고가 아니었다. 단지 「북한의 본질=인민은 굶어죽는데 대량살상 무기만 만들어 수출하는…」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명한 본질을 지적한 것이 북한을 제끼고 남한에서 엄청난 파동을 불러왔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부시 표현법이 너무 느닷없이 투박했다. 둘째는 민주당이 일종의 과민정서를 표출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북한도 그 흔한 군중 규탄대회 한번 열지 않고 「말로만 세게」 나왔는데 남한의 소위 집권당이란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북한입장을 가로맡아 길길이 뛰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찻잔 속 태풍은 불과 며칠 만에 진정되었다. 김 대통령이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 동맹관계…』라며 사태의 성격을 금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민주당 저격수들은 앞장서 「부시 때리기」를 부추기고 대통령은 『한·미 동맹이 가장…』이라며 다른 말을 하고… 마치 양동작전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결국 이 사태를 통해 확실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김 대통령의 『그래도 다시 한번 「남·북」업적을!』하는 임기말 마지막 기회가 모호해졌다는 사실이다. 상황이 무엇이 되게끔 돼 있지가 않은 것이다. 부시가 저렇게 나오고 북한이 저렇게 반응하는데, 더군다나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남·북」을 끌어들여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며, 그렇게 한들 그게 뜻대로 될 것 같은가?

김 대통령 보좌팀으로서는 지금의 정계 판도를 그대로 대선까지 끌고가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이회창씨뿐 아니라 이인제씨도 그들에 대해 100% 안도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남·북」을 빙자한 정계개편 같은 것에 유혹을 느낄 법도 한 일이다.

실제로 민주당 중도개혁 포럼은 내각제를 고리로한 정계개편 구상을 표면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기폭제가 될 「남·북」이 최근의 「미·북」 소용돌이로 그만 김새버린 것이다. 김 대통령은 그래서 이제야말로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모든 집착을 버리고 편안한 노후로 들어가야 한다.

다만 김 대통령이 해야 할 한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작금의 게이트 시리즈를 임기 끝나기 전에 말끔히 파헤치는 「의무」다. 그러지 않으면 그의 퇴임 후에 또 무슨 청문회다 무엇이다 하여 세상이 시끄러워질 터이니 말이다. 국민은 보다 나은 미래를 원하지 과거에 발목잡히고 싶어하지 않는다. 올 여름까지 남은 「한뼘만한 여백」을 대통령 주변의 권력형비리 척결에 최대한 집중시켜야 할 일이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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