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황해도 연백군
▶고모님과 '엿단지추억'
▶"때로는 우린 어머니 몰래 엿을 떼어 먹기도 했는데, 한 번은 엿 떼던 숟가락을 부러뜨려 혼쭐나기도 했다. 그 엿은 그 이듬해 6.25가 날 때까지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엿 단지 추억

큰고모 하면 엿단지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6.25 전후 서울 피난 생활 중에 두 번씩이나 엿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큰 고모님은 날렵한 몸매에 날카로우면서도 지혜로움이 깃든 눈매와 오이씨같은 용모를 갖춘 분이었다. 항상 깊은 사려와 너그러움으로 집안을 이끌었다고 한다. 아버님의 손위 누이로서 장녀로서 성장하며 체득한 여유로움인가 보다.

그러던 고모님이 날쿠리(日谷里)에서 남쪽으로 60리 가량 떨어진, 그러니까 38선 남쪽 20리쯤 되는 황해도 해월면 저지미로 시집을 가셨다. 저지미라는 지명은 마
을 모양이 젖무덤 같이 생겼다고 하여 생긴 것이라 한다.

고모부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안의 4형제 중에 맏이인 이기현이라는 분이었다. 고모부는 매우 개화된 분으로 그 당시 벌써 전기 시설에 라디오, 유성기 ,자전거 등을 구비한 문화 생활을 즐겼던 부농으로 마을의 구장(區長·理長)일도 보고 계셨었다. 넒은 마당에는 연못을 멋있게 조경하여 한 눈에 마을의 지역 유지 위용을 알 수 있었다. 석유 등잔불에 밤을 밝힌 우리 집과는 격세지감이 있었다. 날쿠리에서는 그래도 잘 사는 편에 속했던 우리 집에 비하면 고모님 댁은 갑부 집인 셈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고모님 댁은 벌써 외국에서 도입한 일년감(토마토),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씨앗을 얻어다가 뒤뜰에 심어 평생 처음 맛보는 일년감이 신기했고, 입안에 달콤한 감촉을 주는 사탕수수 맛은 도깨비 사탕물로 상상하기도 하였다. 하여간 고모네 집은 가기만 하면 신기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고모는 다들 시집 잘 갔다고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또 딸 셋과 끝으로 아들까지 두었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아들 이름은 이국진으로 나의 맏 형님과는 나이가 엇비슷하여 맏형은 죽이 맞아 뻔질나게 국진네를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해방이 되면서 38선이 생겨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다. 38선이 생기기 전에는 고모님댁은 걸어서 하룻길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38선이라는 장애물로 먼 거리가 돼 버린 것이었다. 아니 먼 거리보다는 남과 북이라는 국경선이 존재하듯이 서로 왕래를 할 수 없는 이국 땅이 돼 버렸다.

거기에다가 북쪽의 우리집은 무상 토지 개혁이 시작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전 재산은 몰수되고, 우리 집 앞마당에서는 붉은 사상에 도취된 무리들이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좋아하면서 놀아대는 농악 풍물 패거리들로 해서 심적으로 매우 심란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고 할머니께서 자결하는 극한 상황 등이 그것이었다. 곧이어 황해도 장연지방 산골 화전촌(火田村)으로 1차 이주 명령이 우리 집으로 떨어지자 할 수없이 우리 집은 선대 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과 고향을 등지고 새 삶을 찾아 월남 길을 택해야만 했다.

월남길에 나선 우리에게 고모님은 각별한 우애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월남 길에 은묵에 묵고 있을 때 고모님이 고모부와 함께 찾아오셨다. 호구지책을 마련해 주려고 온 것이었다. 고모님은 동생에게 하늘같은 제안을 했다. "낯설고 물 설은 타관에서 어찌 살겠나. 논과 밭, 농기구까지도 지원해 줄 테니 농사나 지으며 같이 살자" 고모님 제의에 아버님은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농사를…"하며 사양했다.
고모님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며 동생을 붙들었다. "그러면, 농사질 일꾼도 내가 지원해 주마"

고모님의 깊은 뜻은 이번 말고도 우리가 북에 있을 때에도 보여 주신 적이 있다. 할머니의 초상과 소상을 치르면서 고모님은 38선을 넘기는 위험도 마다하고 두 번에 걸쳐 많은 제물을 보내 주신 것이다. 또, 우리가 수 백리 밖으로 쫓겨난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동생을 살려야 할 것 아니냐" 면서 고모부를 설득했다고도 한다. 이번에는 아예 직접 찾아와 동생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은 "서울에서 장사나 할 것"이라며 남행을 고집했다. 아마도 매부에게 지는 신세는 "누님의 입장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서울에서의 첫 정착지는 마포구 대흥동 동막이라는 동네로 할머니의 외가뻘 되는 조씨(趙氏) 집이었다.

그 집의 막내아들 이름이 조병옥(趙炳玉)으로 우리와 엇비슷한 나이였기에 그냥 "옥이네"라고 불렀다. 옥이네 집은 꽤나 큰집으로 대문 옆에 따로 붙은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행랑채를 우리에게 할애해 주었다. 부엌 하나 방 하나 허드레 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곳에서의 삶은 궁색 그 자체였다. 부친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빈깡통 장사, 마포나루에서 고무신 장사 등을 했으며, 어머니도 틈틈이 남의 배추밭 솎음 김을 매러 다니기도 하고, 돐도 안된 (막내)상일이를 업고 새우젓 행상으로 나서기도 했다. 맏형도 담배 노점상으로 나서야만 했다.

이 어려운 중에 할머니의 대상(大喪)을 맞게 되었는데 제물(祭物)을 준비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사정을 헤아린 고모님이 또 다시 넉넉한 제물(祭物)을 보내 주어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

우리들은 옥이네 집에서 2년쯤 살다가 전차 마포 종점 뚝방에(마포대교 인터체인지 부근) 7∼8평쯤 되어 보이는 무허가 초가집을 구입하여 비로소 희망에 찬 새 삶을 시작하였다. 급한 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형편이었다. 큰 형님도 여기서 다시 취학(초등학교)의 길을 열었다.

이때, 형님이 겨울 방학을 틈타 고모님의 첫 '엿단지 추억'을 가져 왔다.
형님은 월남 후 처음으로 고모님댁을 방문하는 영광을 가졌다. 물론 고모님의 권유에 의한 것임은 말 할 것도 없다. 고모님 댁을 방문한 큰 형님은 많은 이야기 보따리로 날 가는 줄 모르고 수 일을 융숭한 대접 속에 보냈다. 돌아올 때는 귀한 엿 단지까지 보내 주셨다. 고모님께서 밤새도록 특별히 엿을 고아 조카들 주라고 보낸 것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했다. 역시 고모님이 "최고야! 최고!" 라고 우리 형제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엿은 궁색한 서울 생활 중에는 매우 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은 특별한 날에만 조금씩 숟가락으로 떼어 주는 등 아낌 그 자체였다. 무슨 핑계를 대고 조금만 먹자고 조르기도 하며 이런 저런 꾀를 내어 먹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곤 하였다. 그 놈이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면 엿 단지를 감추어 둔 골방을 드나들며 어머니 눈치만 살피기 일쑤였다.

때로는 우린 어머니 몰래 엿을 떼어 먹기도 했는데, 한 번은 엿 떼던 숟가락을 부러뜨려 혼쭐나기도 했다. 그 엿은 그 이듬해 6.25가 날 때까지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6.25가 난지 3일 만인 28일 새벽 4시쯤인가 억수 같은 장마비 속에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 소리와 함께 한강다리가 끊어졌다. 인민군이 미아리를 넘었다는 소문, 정부는 서울을 포기했다는 소문 속에 피난민들이 구름같이 마포나루로 몰려들었다.

인민군이 들어오면 '피난민은 다 죽인다' 는 소문에 놀라 부친은 벽에 붙어 있던 '송악산 육탄 십용사'22) 포스터를 황급히 찢으며 부랴부랴 봇짐을 쌌다. 이 때 어머니는 아끼고 아끼던 그 엿 단지를 꺼내어 실컷 먹으라고 했지만, 겁에 질린 우리들은 그 엿이 입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먹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나 촉박한 상황에 단지에 눌러 붙은 엿을 떼어내 피난 봇짐에 쌀 겨룰 조차 없었다. 우린 결국 그 엿 단지를 포기하고 불과 두어 시간만에 봇짐을 싸가지고 나섰다. 이건 피난이 아니라 '탈출극'이나 다름없었다.

마포나루에는 벌써 피난민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지만, 장마로 불어난 강물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게다가 거룻배 2∼3척만이 사람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것도 배가 강가에 다가오면 서로 달려드는 피난민을 제지하려고 헌병들이 비 오듯 갈겨대는 위협 사격에 민간인은 얼씬도 못했다. 군경과 그 가족이 우선 이었다. 자연히 일반 피난민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아비규환 속에 시간만 흘러갔다. 어찌 이런 상황에 도강이 가능하겠는가 궁리 끝에 당인리 쪽으로 내려 와서야 새우젓 배 하나를 겨우 얻어 탈수 있었다. 배는 밤섬을 지나 여의도 모래밭에 우릴 내려놓았다.

해가 중천에 솟은 것을 보니 시간은 벌써 9-10시는 족히 되어 보였다. 앞을 보니 벌써 인민군이 미아리 쪽에서 쏘아댄다는 포탄이 모래 가루를 날리고 있었다. "쾅!∼ 풀썩 삐∼용∼꽈광! 풀썩 풀썩" 혼비백산하여 시흥―수원―평택―조치원―청주를 거쳐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까지 달아났지만, 인민군의 남진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우리를 앞지르고 말았다. 그 바람에 더 이상의 남진을 포기하고 청천리에서 며칠 신세를 졌던 주인 마님의 호의로 더 깊은 산 중 하늘 아래 마을인 관평까지 따라 나섰다가 묘수를 못 찾은 우리는 서울로 다시 북상 중 너더리(성남시 판교)에서 9.28 수복을 맞았다.

피난에서 돌아오니 고모님의 '엿 단지는 없었다.' 같은 문중사람으로 고향에서 월남해 한때 어려운 삶을 같이 했던 부엉바위 할머니(東鎬양반 어머니)가 갖다 드셨다고 한다. 우리와 상련(相憐)의 정을 나눴던 분이니 다행이 아닌가. 환갑을 훌쩍 넘긴 할머니는 6.25 전까지 노구를 이끌고 마포나루에서 손수 맷돌질을 해 가면서 우리와 동업으로 메밀묵 장사를 했던 분이다.

그 후에도 고모님의 '엿 단지 추억'은 한 번 더 있었다. 9.28 수복에 이어 고향이 회복되자 아버님은 단신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두고 온 산하 모셔진 선영(先塋)도 돌보고 끊겼던 친지들도 만나니 꿈만 같았다. 피난살이 3년만이었다. 아버님에게는 생애에 가장 행복하고 활력이 넘치는 시기였다. 마치 개선장군이 금의환향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중공군의개입으로 1.4 후퇴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헤어져야 하는 이웃과 친지들 떠나야 하는 고향, 이 모든 것들이 아버님의 활력소를 앗아가고 있었다.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가자 아버님은 황급히 또 다시 남행길에 나서야만 했다. 남행 길에 고모님 댁도 들렀다. 불길한 전선 소식에 불안해 하던 고모님은 동생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이 때 아버님은 당신의 어려웠던 피난살이가 지겨웠던지 곧 전선이 호전될지도 모르니 그때까지 몸만 잠시 피할 일이지 '섣불리 피난길에 나서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엄동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나선다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황은 점점 악화되어 육로(陸路)는 이미 끊기고 해로(海路)도 여의치가 못했다. 배편도 없었는데다 피난민들은 감호라지 포구에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구는 예성강을 거쳐 남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뱃길이었다. 위급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차에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지 배편 소식이 왔다. 고모님의 주선이었다. 고모님은 '쌀 한 가마'와 '엿 단지'를 들려주며 포구까지 따라나섰다. 포구에서 전마선으로 떠나는 동생을 배웅하며 고모님은 동생과 재회의 날을 굳게 약속했지만, 이 헤어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너무나 짧은 만남, 긴 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아! 고마우신 고모님
자상하신 고모님
그 때 고모님이 보내주신 쌀로 지은 쌀밥을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감호라지―예성강―강화―인천을 거쳐 서울까지 운반된 쌀로 지은 고모님의 사연 깊은 쌀밥이었다. 같이 보내 주신 '엿 단지'도 우리 사 형제가 두고두고 떼어먹던 기억은 지금도 고모님을 더욱 그립게 하는 촉매제로 남아 있다.

한편, 포구에서 집으로 돌아간 고모님은 곧 인민군의 한 무리와 조우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곧 큰 재앙을 불러들였다. 넓은 마당, 큼직한 집을 본 인민군들은 그들의 식주(食住)를 부탁하며 몰려들었고, 마음씨 넓은 고모님은 이들을 받아 들였다. 마당 한 쪽에 방공호도 파 놓고 공습에 대비했다. 하지만 미군기가 가만 둘 리 없었다 즉각 공습을 불러들인 것이다. 고모님은 먼저 자녀들을 방공호 속으로 피신시켰지만 공교롭게도 직격탄이 이 방공호를 때렸고 안에 있던 자녀들은 모두 사망했다. 집까지 전소해 이불 한 장 남지 않았다. 어찌 이런 재앙이 있겠는가?

오! 참담하고 슬픈 일이로다.
자식과 전 재산을 졸지에 모두 잃다니…

더구나 공습에 희생된 국진이는 외아들에 장손이 아닌가. 고모님의 낙심은 아마도 하늘에 닿고도 남았을 것이다. 얼마나 긴 통곡으로 절망을 이겼을까? 아버님이 고모님에게 피난가지 말라는 말만 안 했어도, 아니 고생스럽지만 같이 피난길에 나서자고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그러나 앞일을 누가 알겠는가 운명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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