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평양
▶회고록 '망향의 언덕'중에서
▶"나는 후일 하나님께 청원하여 지옥을 면할 수만 있다면 천당에는 아니 가고 기꺼이 "옛날의 고향 노악골에 가겠노라" 고 서슴없이 외치고 싶다. 그리하여 정다웠던 이웃 분들에게, 내 가족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
 



아버님, 어머님
-아버님, 어머님의 빛바랜 사진을 꺼내들고

아버님!
어머님!
어려서 당신을 잃고 사진속에서 뵙던 그 모습 '50여년이 지나 막내 정상이의 도움으로 뵈오니 이 소자는 그저 미어지는 가슴과 뜨거운 눈물만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어려서 남들이 '엄마, 아빠'를 부르며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수없이 울며 자랐습니다. 당신의 사진을 대하니 아득하게 망각된 과거의 어렴풋함 속에 점점 형체를 또렷이 하고 아버님 어머님은 다가옵니다.

아버님은 언제나 당당하고 과묵한 엄부의 기상으로, 어머님은 언제나 후덕하고 정겨웠던 중후한 인상으로 내 가슴에 꽉 차오고 차츰 떨려오는 심정에 소자, 그저 엉엉 한없이 웁니다.

당신께서 가신 후 우리 7남매는 6.25의 냉혹한 시절, 아수라장 속에 남북으로 흩어지고 그 중 넷이 비극적 종말을 고하고 북에 정칠이, 정상이, 남한에 나 하나 간신히 살아 남았으니, 형제의 애끊는 그리움 속에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함께 당신의 묘앞에 서지도 못하는 처절하고 냉혹한 현실에 그저 치밀어오르는 격정의 울부짖음으로 이 글 위에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 하오리까!

아 아! 아버님 어머님!
당신이 가신 후 우리 형제는 실로 어둡고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릴 때 응어리가 쌓이던 그 기나긴 세월, 돌이켜보면 아련한 슬픔의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네 분 형들은 모두가 애국 충정의 정열이 활활 타오르는 분들로 아래 우리 동생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키워주셨습니다.

가련히 살다 비운에 가신 형들을 회상함에 생전에 초록빛 사랑에 넘치던 아름다운 형제간의 서정이 가슴을 저미는 감동으로 밀려와 주르르 흐르는 눈물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부디 아버님 어머님, 형들의 영혼을 위로하소서…
땅거미 지는 저녁, 저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을 그저 수없이 돕니다. 온 천지에 적막이 더해가고 하늘의 고요가 내리는 이 밤 하늘엔 초롱초롱 별만이 반짝입니다. 나는 고독을 씹으며 돌고 돕니다. 양볼에 뜨거운 눈물만이 흐릅니다.

머리에는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유택인 탁고개묘, 상록, 상환, 정묵, 정호형의 얼굴을 그리며 형들의 묘는 어디 있을까 생각합니다. 몹쓸 세상에 고생 고생하다가신 형들에 대한 연민의 정은 아련하기만 합니다.

정상이, 정칠은 북에서 저 별을 보고 있을까? 이러한 생각만을 되풀이하는 나의 마음엔 허허로움만이 밀려오곤 합니다. 밤바람에 나부끼는 포플러잎의 사각거리는 소리들, 당신과 형들 영혼의 애잔한 울부짖음인 듯 내 가슴에 울려옵니다.

'아 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부모란 무엇인가? 형제란 무엇인가?' 하고 나는 긴 한숨을 쉬어 봅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의 어엿한 사진한 장 이라도 갖게 되었으니 생기 넘치는 기쁨에 마음이 찰랑거립니다.

아! 이 사진 한 장!
시공을 초월한 부모와의 만남…
내 마음을 담은 이 글이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꿈에라도 만날 수는 없을까…
기쁠때나 슬플때나 당신의 모습을 가슴에 담고 의지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고 사진앞에 나의 삶을 매일 매일 고하며 외롭지만 참다운 인생의 삶을 영위할 것을 영전에 약속드립니다.

1993년 8월


내고향 노악골
용악리(龍岳里)-농악리-노악리-노악골

노악골!
따뜻한 봄은 대지의 산과 들에 찾아온다.
멀리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 오르는 이 봄, 노악골에도 봄은 오리라! 앞산에 진달래, 개나리 울긋불긋 피고 용악산과 소록봉에도 뻐국새 뻐국 뻐국 울어대리라!

상상의 나래는 내 마음을 실고 훨훨 저 구름 위를 넘고 넘어 벌써 용악산 산마루에 올라왔다. 정다운 산천 노악골- 윗동네, 샛동네 하동과 안골이 눈앞에 펼쳐진다. 봄, 여름, 가을 계절 따라 산과들에 이름 모를 무수한 꽃들이 피고 마을 앞 뒤산과 들에서 뛰놀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하고 허무한 세상을 노래한 어느 시(詩) 구절을 되새겨 본다. 봄이면 강가에서 더벙게를 잡았고, 산과 들에서 나물캐며 소리채 뻐국대 꺽어 먹던 고향 산천! 그곳은 정녕 정겨운 내 고향 마을이였다.

여름이면 들국화꽃이 만발한 언덕에서 산딸기를 따먹기도 하고 뒷동개, 순화강에 나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쑤어 먹기도 하던 어린 시절 나의 고향 노약골!
언덕에서 뛰놀던 동산의 열정, 가버린 과거에 대한 애잔한 연민을 자아내는 곳 이기도 하다.

가을이면 가을 빗물따라 내려가는 게떼를 통그물로 잡아서 겨울내내 저러 먹곤 하던 저 큰동 벌판 비가 내릴 듯 검푸른 가을밤이면 청개울과 새틀에 뽕나무 줄기따라 착한 사람에게 금방망이, 은방망이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준다는 붉은 도깨비불이 뻗어 다니던 이 마을, 수많은 반딧불이 밤하늘의 별같이 검은 하늘을 수놓으며 오가던 곳이다.

밤의 적막이 온 마을을 뒤덮은 야음속에 멀리 안골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접동접동(소쩍소쩍) 구슬피 우는 접동새 소리가 그칠줄 모르던 곳 그곳은 정녕 '에덴의 동산'이요, 낭만과 꿈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새벽에는 새틀 논에서 수 만 마리의 개구리 소리가 요란히 들려 왔고, 그 '개굴개굴'소리는 희망찬 새아침의 경쾌한 교향곡과 같이 들려오고 밤이면 자장가와도 같이 정겹게 들려오곤 하였다.

저 많은 밭과 논에서 밭갈이 하는 농부의 이라 쮸쮸 이놈의 소 하는 소 모는 소리가 내 귓가를 울린다. 나물 캐는 처녀들이 바구니 끼고 오갔고, 광주리에 점심을 이고 나르는 아낙들과 밭둑에 모여 앉아 한가로이 점심을 먹는 농부들의 모습이 선하게 비쳐 온다.

그들은 모두 주먹으로 코를 닦고, 흙이 더덕더덕 묻은 잠뱅이를 입었으나, 착하고 정직했으며 인생의 바른길을 부지런히 걸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동리 어느 집에서 초상이라도 나면 다같이 모여 울며 같이 슬퍼했고, 잔치라도 있으면 모두 모여 기쁨도 같이 했다. 떡이나 맛나는 음식을 해먹을 때도 반드시 이웃과 서로 나누어 먹었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이 오가는 이웃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저보다 나이든 윗분에게는 꼭 정중한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내가 어릴 때 동리에서 못된 장난을 하면 이놈 하고 동리 어른들은 불호려을 하였고, 자기 자식처럼 바른길을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동리 어른들을 무서워하며 자랐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어려워하고 존경하며 자랐다. 마을앞 길가에 다니기 불편한 구루마 바퀴 자국이나 음푹패인 구덩이에 장난삼아 주위 돌을 주워 메꾸면 동리 어른들은 애야, 너는 정말 착한 애야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 어른은 집에 돌아가 자기 자식들에게 '아마 집에 누구 아들을 본 받아라' 하시고 어른들끼리 모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와 같이 대수롭지 않은 일에 어른들이 칭찬을 하면 어린 우리 마음속엔, '착한 일을 하고 또 해야지'하는 마음을 솟구치게 하였고, 뿌듯한 마음을 느끼게 하였다. 이제 돌이켜 노악골을 회상하니 온 마을 어른들은 정말 위대한 마음의 스승이었다고 나는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 후손은 맥주홀이나 영화관, 안방 T.V에서 차림새가 요란하고 현란한 춤과 몸짓, 찢어질 듯 괴성을 지르는 혼란스러운 대중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요란스레 달리는 자동차, 총격 소리 등 현기증 나는 광란과 살인 장면만을 보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현란한 장면과 수천억의 부정축재로 건전한 사회토대인 고매한 도덕이 일순에 문해지는등 추악한 영상만이 가득한 매체를 날마다 보며 자라고 있다.

그때마다 '저기서 무엇을 배우랴?' 하고 나는 어지러움과 공포를 느낀다.
우리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 그 삶 속에서 인생에 꼭 필요한 덕성을 배웠건만, 오늘의 저 젊은이들이 배울 곳은 어디 있을까 하고 나는 한숨을 쉬곤 한다. 저렇듯 잔인한 살인과 광란속에서 빙빙 어지럽게 머리를 돌리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저 어지러움속에 자라 부모 형제 자매는 물론이요, 사회와 국가에 화합하고 주위를 사랑하는 인물이 어찌 나올수 있을까?

더욱이 어떤 놈은 미친 듯 칼을 휘둘러 평생 먹고 살 재산을 모으고도 그 욕심이 끝이 없는 오늘의 세상을 되새겨 본다. 서로 이기심의 화살을 쏴대고 칼을 휘두르니 무겁고 답답한 갑옷을 벗고 하루도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어 모두 불안해 하며 내가 언제 망할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험한 세상속에 서로 속이고 할퀴고, 아귀다툼 속에 살다가는 못된 세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세상 속에 천국과도 같이 극락과도 같이 내고향 노악골은 아련히 내마음에 떠 오른다. 우리 마을에는 교회와 학교가 있었다.
노악 교회의 목사는 곧 신이었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임 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오시는 목사님은 교인은 물론이고 온동리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오늘날의 사이비 목사가 아니고 마을 사람과 슬픔도 기쁨도 같이 하는 진정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보광 학교(후에 용악국교로 개칭) 선생님들도 모두 존경 받았다. 그들은 마을에 사랑을 전파하고 동리 사람들의 눈을 뜨게하여 모두가 우리 마을의 등불이었다.
마을 앞에 우뚝 솟은 장엄한 용악산!
아침마다 찬란히 빗나는 태양은 그 위에 떠오르고, 법운암 종소리 우리 마음을 두드렸다.

아 아! 나는 이 마을에서 지극한 유교의 효심과 예의를, 불교의 인자한 불심을, 기독교의 참사랑을 배울 수 있었고, 상호 신뢰의 믿음과 협동을, 그리고 또 근면함을, 동리 어른들의 순박하고 진실한 삶속에서 몸소 느끼며 마음으로 배웠다. 진정 훌륭한 인격 수양의 도장이었다고 나는 자주 회고한다.

아마도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그와 같은 '정신적 선물'을 못 받았다면 그후의 더러운 세상만을 전전하면서 살아온 내가 어찌 되었을까? 아마 큰 죄 없이 살고 교도소 신세를 지지 않은 것도 다 노악골의 덕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아! 노악골, 그곳은 우리 피난 나온 모든 동리 사람에게 공평 무사하게 이와 같은 마음의 선물을 고루고루 주었다. 피난 나올 때 유난히도 어깨를 짓누르고 무거웠던 피난 보따리는 그 마음의 선물이 너무나 큰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이러한 노악골의 은혜를 느낄 줄 알아야 하고 인생 교육의 최고 도장이요, '에덴의 동산'이었던 고향 노악골의 그 마음의 선물을 우리가 이곳에서 얻은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라도 자주 노악골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또 고사(古史)에 보니 용악산은 그 옛날 농학산(弄鶴山)으로도 불리워져 왔으며 모든 날짐승의 영물인 학이 거닐며 노는 신성한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득히 먼 그 옛날 백학의 큰 떼가 농학산에 오르고 노악골의 온 마을을 뒤덮고 살았기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으리라 나는 믿는다. 그러한 학의 떼가 무리지어 나르는 곳,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되어 이곳에 우리 선조들이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대대로 학의 고고한 기상과 깨끗함을 본받아 살아왔음이 또한 명백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같이 우리가 살던 곳은 인정의 꽃이 만발하고 화기 애애한 극락 정토의 마을이었다.

나는 20세에 그 고향을 떠났고, 오늘 여기 서울에서 어언 60의 인생 고개에 서서 내가 살아온 옛날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

공무원과 회사 생활, 구미와 동남아를 돌고 돌며 여러 곳을 두루 보았으나 우리 마을 노악골 같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음의 동산을 나는 못 보았다.

우리 모두가 소음이 요란해서 제정신을 차릴 수 없고 벼겨와 먼지가 뒤범벅인 시골 방앗간(정미소)의 어둡고 캄캄한 구멍을 들락거리며 나락을 훔쳐먹고 사는 쥐떼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저 흐린 물속에서 탁한 물을 마시며 그 더러운 시궁창속을 누비며 사는 미꾸라지 모양의 삶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산다기보다는 그저 마지 못해 아무 뜻없이 생존되 왔다고 함이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오늘날, 역대의 위정자는 미친 듯이 떠들며 산업 사회니, 복지 사회니, 뭐니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한마며 야단 법석이나 고매한 도덕이 수천억의 부정한 축재로 여지없이 무너지는 위선의 세월속 과연 무엇을 배우랴? 모든 사람은 불안과 초조속에 동분서주 정신없이 뛰어 다녀야 하고, 소음과 오염속에 빈민굴과 불량 청소년만이 늘어간다.

어디서나 정직과 근면은 찾을 수 없고 사기, 분열을 날로 심화되어 파당을 짓고, 말할 수 없는 불신과 갈등속에 분쟁만이 더하여 간다.

협동과 화합, 사랑속에서 느긋한 마음의 여유를 느끼며 서로 믿고 사는 안정된 세상, 따뜻한 인정이 오고 가는 살맛이 솟구치는 신나는 세상과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나는 몰라라 하는 야박한 세상, 신의와 인정이 마른 삭막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정말 더럽고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으로 치닫고 있는 속에 오곡이 무르익고 백화가 계절따라 만발하는 내 고향, 근엄한 신산(神山)이 정기를 내뿜으며 웅장하게 높이 솟은 용악산, 한없이 부드럽고 사랑과 자애로움이 넘쳐 흐르는 대보산을 바라보며 살던 내고향 노악골 생활이 더더욱 그리워진다.

우리 마을은 저 대보산이 비폭력 애국 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낳았고, 마을 뒤에는 구천리(龜村里:일명 딴들기)에서 서당 공부를 한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 못에 먹을 갈아 공부해 못 물이 검어졌다는 세현지(洗峴지) 또는 을지소(乙支沼)의 검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유서깊은 곳이다.

저 멀리 대보산이 안개와 구름속에 여신과도 같이 다소곳이 앉아 무언가 우리 마음에 속삭여 주는 듯하던 내 고향 노악골, 용악산이 엄숙하고 숙연한 마음을, 저 인자한 대보산이 인정미 넘쳐 흐르는 부드러움을, 저 순화강 들꽃이 아름다운 마음을 담뿍 안겨주던 노악골이 새삼스레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맑은 물, 맑은 공기를 이 세상에 내쉬어 보탬이 된 것이 하나없다. 따라서 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고 믿는다.

허나 나는 후일 하나님께 청원하여 지옥을 면할 수만 있다면 천당에는 아니 가고 기꺼이 "옛날의 고향 노악골에 가겠노라" 고 서슴없이 외치고 싶다. 그리하여 정다
웠던 이웃 분들에게, 내 가족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

내 마음은 예고향 노악골과 오늘의 우리 삶의 터를 오가며 긴 한숨을 쉬어 본다.
아! 내 고향 노악골!

그곳에 산 것이 나의 삶의 보람이요, 자랑이고 긍지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교하 후손들은 평화의 내 고장, 내 사회, 내 나라를 위하여 학의 고고하고 깨끗한 기상이 넘치는 참된 일꾼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노악골을 생각하며…

1986년 4월

교하 김씨 김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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