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남북 외무장관회담은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북한 백남순(백남순) 외무상은 이정빈(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타국에 와서 이 선생을 만나서 기쁘다”고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 장관이 “남북선언 정신에 따라서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자”고 인사말을 건네자 백 외무상은 “두 정상이 만나서 진지하게 의논하시고, 역사적인 선언을 해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됐다. 북·남 사이에 교류협조가 눈에 띄게 잘되고 있다”고 화답했다.

이 장관이 “임동원(임동원) 국정원장이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고 하자, 백 외무상은 과거 남북회담 대표로 마주했던 이동복(이동복) 전 국회의원에 대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같은 우호적 분위기는 미사일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어졌다. 두 장관은 국제무대에서 상호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대결로 점철됐던 과거에는 상상조차 힘들었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회담은 6·15 공동선언 후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두 장관은 국제무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력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공감을 이뤘다. 다자(다자)회의에 함께 참석할 경우 상호 공동이익을 위해 대화를 갖는 방법, 남북이 모두 상주 공관을 두고 있는 주재국에서 외교채널을 가동하는 방안 등이 거론됐다. 당장 9월 유엔총회에서 딱딱한 회담 대신 오찬이나 만찬을 갖기로 한 것 등은 진일보한 합의로 보인다.

아시아개발은행(ADB), 세계은행(IBRD),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등 북한이 아직 가입하지 못한 포럼이나 국제기구에 가능한 한 북한측이 활동을 시작하도록 우리측이 지원하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동참시키려는 노력의 첫발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미사일 문제가 나오자 분위기가 달라졌던 듯하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김정일(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건부 미사일 개발 포기’ 발언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느냐”는 물음에 “각자의 입장을 밝혔다”고만 설명했다. 그렇다고 미사일 문제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하기에는 이르다고 이 당국자는 덧붙였다. 지금까지 남북한간에 북한 미사일 문제를 진지하게 거론조차 못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첫 술에 배부르기를 기대하기는 당초부터 어려웠지 않느냐는 것이다. 두 외무장관은 또 9월 미국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새천년 정상회의’에서 김대중(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국가원수(Head of State) 자격으로 참석하는 김영남(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간의 회동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 국제무대에서의 남북간 본격 접촉이 사실상 상설화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방콕=이하원기자 may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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