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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은주는 왜 유서를 써야 했나-9년간의 탈북 이야기
조선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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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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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에 은덕에서 서울까지 생사를 넘나든 9년간의 탈북 이야기

   
▲ 미국 샌디에고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때의 김은주씨. 은주씨는 최근 북한에서의 굶주림 경험과 목숨을 건 탈북 등 9년간의 탈북이야기를 담은 <열한 살의 유서>를 펴냈다.
1997년 6월 22일, KBS의 <일요스페셜>이란 방송은 본 국민은 경악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북한의 대기근 현실이 생생한 영상을 통해 안방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변에서 탈진한 채 쓰러진 어머니와 그 품을 파고드는 젖먹이 아이, 영양실조로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깡마른 꽃제비들이 장마당의 더러운 시궁창에서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는 모습, 이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주변 사람들, 한 바가지의 옥수수 가루와 나뭇잎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식구들, 그리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다가 경비원에게 사살당한 채 강을 떠다니는 시신들···.

한마디로 ‘인간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죽기 전인(1994년)인 1992년부터 이미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1997~98년에는 기근이 거의 절정에 달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1997년에 이미 중국에는 2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식량난민들이 넘어와 있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이런 대기근의 참상을 외부에 철저하게 숨겨왔다. 대다수의 우리 국민도 이날 KBS가 방영한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북한의 식량난과 대량아사를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끼곤 했었다.

   
▲ 1997년 KBS '일요스페셜'에 소개된 북한 꽃제비
서강대 4학년 졸업반인 김은주(27)씨는 1997년과 98년의 대량 아사(餓死) 시기에 모질게 살아남은 소위 ‘꽃제비’ 중에 한명이다. 서강대 부근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은주씨는 키가 또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았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인터뷰 내내 보인 밝은 모습에서 굶주림과 목숨을 건 탈북, 그리고 9년간의 힘겨운 타국 생활을 견뎌낸 과거가 숨겨져 있다는 게 쉽게 연상이 되지 않았다.

◇11살의 유서, ‘엄마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용서해’

함경북도 은덕에서 태어난 은주씨는 11살 때인 1997년 11월 아버지를 영양실조로 잃었다. 아버지를 잃은 은주씨 가족에게 남은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이 은주씨와 언니, 그리고 어머니 세 모녀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은주씨 어머니는 처음에는 집안에 남은 세간을 팔아서 연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은주씨와 언니는 학교도 다닐 수가 없었고 온종일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 심지어 아파트에 키우던 토끼 철조망에 토끼배설물과 함께 굳어 있던 나물 쪼가리까지 골라서 먹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던 어느 날 은주씨 어머니는 언니를 데리고 중국인이 많이 드나들던 나진ㆍ선봉(경제특구) 지역에 가서 음식을 구해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은주씨에게 남긴 음식은 옥수수 30알 정도(두부 한모 살 수 있는 돈) 였다. 어머니는 “옥수수를 하루에 열 알씩만 먹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텅 빈 집안에는 11살의 야윈 은주씨만이 남아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식량을 구하러 간 어머니는 엿새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은주씨였지만, 자신이 분명 죽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은주씨는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하는 마음, 그럼에도 보고 싶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힘을 모아 유서를 남겼다.

‘엄마 죽을 것 같아요. 엄마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용서해.’

열한살의 은주씨는 그렇게 유서를 썼다. 그리고는 차디찬 방다박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다. 몇 시간 후 흐릿한 의식 속에 인기척이 들렸다. 마치 기적처럼 어머니와 언니가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손에는 은주씨의 목숨을 구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 같이 죽자”며 추운 아랫목에 딸 둘을 눕히고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나진ㆍ선봉에 가서도 음식을 구하지 못했으니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굶주림으로 새로운 묘지가 즐비한 북한의 어느 야산. 그나마 이렇게라도 묻힐 수 있으면 행운이다. 은주씨는 장마당에서 죽은 이들을 손수레에 싣고 한 구덩이에 몰아서 묻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세 모녀의 목숨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전날 같이 죽자던 어머니는 무엇인가 결심했는지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의 초상화가 든 액자를 떼어냈다. 어머니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두 영도자의 사진은 불태우고, 액자를 내다 판 얼마간의 돈으로 음식을 마련했다.

집에 마지막 남은 세간인 농까지 땔감으로 쪼개서 팔고 나자 더는 팔 것이 없었다. 세 모녀는 구걸하거나, 땔감을 구해 팔고, 풀을 뜯고, 버섯을 캐고, 쌀과 옥수수를 훔치려고 들판을 헤매며 모진 목숨을 연명했다. 꽃제비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은주씨 어머니는 마침내 북한 땅에서는 더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탈북을 결심한다. 무슨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살고자 하는 본능이 이들 세 모녀를 조국과 고향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당에 대한 배신의 대가가 두려웠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강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나았다. 1999년 세 모녀는 두 번의 시도 끝에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 김은주씨의 탈북 이야기를 다룬 <열한 살의 유서>
은주씨는 자신과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엮어 지난 10월 4일 <열한 살의 유서>(씨앤아이북스)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원래 은주씨의 이야기는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의 세바스티앙 팔레티 서울특파원을 통해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 ‘북한 지옥탈출 9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어 노르웨이에서도 출간되었고, 유럽의 관심을 끌자 한국에서 역으로 번역 출판이 된 것이다. 은주씨 말이다.

“저도 저와 가족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겪은 일이 여느 탈북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에요. 책을 쓰게 되면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공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걱정했었습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북한 주민을 생각하면 우리 탈북자들이 마냥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북한 인권이 개선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합니다. 개인과 가족에게는 아픈 기억이지만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까지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해야 하기에 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어요.”

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지옥’이 펼쳐졌다. 이들을 반기는 사람도, 음식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탈북이었지만, 낯선 중국에서 사는 것은 배고픔 하나만을 해결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잃어야만 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세 모녀는 결국 인신매매에 걸려 어느 중국인 농부의 집으로 팔려갔다. 두 딸을 지키기 위해 은주씨 어머니는 원하지 않은 사람과 살아야 했고, 그곳에서 아들(은주씨 남동생)을 낳았다.

은주씨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산 3년 동안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말까지 들으며 참고 견뎌야 했다”고 한다. 배고픔은 해결 되었지만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뒷산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향해 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3년이 가지 않았다. 2002년 3월 30일, 마을 주민 누군가의 밀고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거지’, 조국에서는 ‘인간쓰레기’ 취급
   
▲ 2012년 2월 23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김은주씨가 ‘중국 인민들에게 전하는 호소문’을 읽으며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은주씨는 “탈북자들의 죄는 배고픔을 느낀 것뿐”이라며“중국 정부가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조선DB.

‘중국 아이까지 낳았는데 조금의 아량은 베풀어 주겠지.’

헛된 기대였다. 중국 변방대(북송할 탈북자들을 모아 놓는 곳)에 갇혀 있는 5일 동안 체포된 탈북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에 쓸모없는, 그들을 귀찮게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남자들을 가두어 둔 에서는 맞아서 괴로워하는 신음이 들렸습니다. 맞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도 없었어요. 어쩌면 ‘정당함’이란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북송되어서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 중 하나인 신체검사는 알몸 상태에서 진행됐고, 속옷부터 생리대까지 찢어가며 모든 곳을 뒤졌다.

   
▲ 2005년 자유북한방송은 북한군 초소의 군인들이 탈북 여인을 구타하며 취조하는 동영상을 입수해 방영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오직 돈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수치스러움을 느껴서도 안 되고, 수치스러워할 자격도 없는 존재였어요. 내가 나고 자라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내 나라에서 이런 ‘인간쓰레기’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조사가 끝난 후에는 5~6평 남짓한 감옥에 갇혔다.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는 지독했다. 한쪽 벽은 쇠창살로 되어 있어 밤낮없이 감시원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은주씨는 “인간으로서 부끄러움, 민망함과 감정은 북송 시작부터 금지된 대상”이라고 말했다.

15일 후 노동단련대로 이송되었다. 중국에서 젖도 떼지 못한 아이를 두고 북송된 은주씨 어머니는 극심한 젖앓이를 했지만, 감히 아프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견뎌야 했다.

“어머니는 강제노동과 젖앓이로 사상교육 받던 중 쓰러지셨어요. 정말 어머니를 잃는 줄 알고 너무나 두려웠지만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음 어쩌면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었어요. 죽는다고 한들 누구하나 슬퍼해 줄 사람도 없었어요.”

은주씨 어머니는 수감자가 사온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후 은주씨 가족은 청진 도집결소로 이송됐다. 청진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시던 곳인데 모두 굶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도 집결소에 가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우리가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북한은 당시 식량난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소식이 없으면 죽은 걸로 간주하여 호적에서 삭제를 하였거든요.”

불행 중 다행으로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은주씨 가족은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마침 고향인 은덕에서 다른 죄수를 호송하러 안전원이 왔는데, 청진 보위부에서는 은주씨 세 모녀를 그 안전원에게 인도한 것이다. 2~3일 여정의 식비를 대며 일전 한푼 없는 세 명의 여성을 데리고 가야 했던 안전원의 난처한 입장을 은주씨 어머니는 역이용했다. 당시 북한은 죄수를 호송하기 위한 식량조차 호송 담당자가 마련해야 할 정도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은덕에서 온 보위부 요원을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는 어차피 고향에서 사망처리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알아서 은덕까지 갈 테니 놓아주면 당신도 식량 부담을 덜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얼마간 설득하자 정말 그 사람이 우리를 놓아주었습니다.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2002년 6월 다시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강제북송의 고통을 끝났지만, 은주씨 가족의 마음속에 더는 고향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남아있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북한에서 온 거지’ 대접을 받았고, 고향 북한에서는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재탈북에 성공한 은주씨 가족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2006년 브로커에게 1인당 2만 위안을 내고 몽골의 고비사막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탈출, 이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재탈북 후 따로 떨어져 도피생활을 하던 은주씨 언니는 2008년 한국으로 들어와 가족이 재회했다.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았으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
   
▲ 출판 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은주씨는 어머니가 중국인에게 팔려가고 강제로 새 시집을 갔는데 그것조차도 ‘운이 좋은 경우’라고 했다.

“탈북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브로커들에게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인신매매에 팔려가 매음굴에서 매춘을 강요받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우리도 인신매매하는 자들의 손에 떨어졌지만,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제가 아는 아주머니의 딸이 16세였는데, 팔려간 중국 집에서 딸이 다시 팔려서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브로커들은 어차피 돈이 목적이기 때문에 딸을 강제로 납치해서 다른 곳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처럼 모녀지간도 나이가 차면 각자 따로 팔려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나와 언니는 그나마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랑 항상 붙어 있을 수가 있었죠.”

은주씨는 한국에 온 후 서울 강서구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세현고)에 다녔다. 우리 나이로 스물두살의 늦은 나이에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북한을 탈출한 11살 이후 중국을 떠돌면서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어요. 한국에 와서 진로를 선택할 때 고민도 많았어요. 또래보다 4~5살 많은데 과연 적응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어쨌든 고2에 편입했고, 배운다는 열정이 가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어요. 열정과 상관없이 수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아는 것이 없으니까 너무 힘들었죠. 그래도 쉬는 시간마다 짬을 내서 영어를 가르쳐준 선생님 덕분에 따라갈 수 있었던 같아요.”

은주씨는 2009년 서강대에 입학해 중국문화와 심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취업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동심리학자가 되는 게 꿈이에요. 북한에서 중국에서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나 버려진 어린 소년소녀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어요.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은 취업을 할 생각이에요.”

-은주씨는 기억력이 정말 좋은 것 같네요. 어려웠던 시절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하면 힘든 점도 있을 텐데.
“저는 탁아소에 다닐 때도 기억을 해요. 남한에서 삶은 대체로 큰 굴곡이 없는 삶이잖아요. 저도 이런 상황에서 살았으면 옛날 일을 세세하게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탈북자로서 고향을 떠나면서 한시라도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중국에서 힘든 도피생활을 하면서 고향과 어릴 적 추억이 그리웠어요. 밤이면 우리 모녀 셋이 늘 고향 이야기를 하고, 북한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어요.”

-북한의 식량 위기는 1990년 중반부터 있었는데 왜 1997년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나요?
“물론 이전부터 배급이 줄어들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어머니가 병원 식당에서 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먹고살 만했습니다. 어머니가 늘 식당에서 쌀과 밥을 가져오다 보니까 크게 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배급은 거의 끊어졌고, 병원에서도 식량이 떨어져 환자들에게 밥도 못 주다 보니까 집에 가져올 양식이 없어졌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병이 나서 쓰러졌어요.”

◇당의 명령에 충성한 고지식한 사람부터 죽어나가

은주씨의 아버지는 1ㆍ21일 화학공장의 노동자였다. 무기를 만드는 공장이었지만, 식량난으로 배급이 제대로 공급이 안 돼 은주씨의 아버지는 영양실조로 몸이 쇠약해졌고, 늑막염으로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병으로 공장에 나가지 못하니까 그나마의 배급도 완전히 끊어졌다.

“1995년 이미 외할아버지가 굶주림으로 쓰러지셨는데 노인과 어린이부터 차례로 죽어나갔습니다. 간혹 몇 개월마다 한두 킬로씩 배급이 나와도 그걸로는 버틸 수가 없죠. 식량난 당시 북한 체제에 충성하고, 당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고지식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사람들부터 가장 먼저 굶어 죽었습니다. 배급은 없는데 당에서 다른 살 방도는 주지 않으니까 그냥 꼬꾸라진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체제에 대한 불만은 없었나요?
“불만도 뭘 알아야 가질 게 아닙니까. 북한은 외부 정보가 다 차단되어서 뭐가 왜 잘못되었는지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합니다. 당시에 우리가 못사는 것은 맞지만 ‘미국놈과 남조선놈, 간첩 때문에 농사를 망쳤다’고 당이 선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설사 원망의 대상이 있다면 미국인데 미국을 어떻게 하겠어요. 당시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굶어 죽으면서도 추호도 장군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 먹을 것을 찾아 풀뿌리를 캐고 다니는 북한 어린이들.
하지만 굶주림과 싸우면서도 은주씨와 북한 주민들이 추호도 의심과 원망을 하지 않았던 ‘위대한 장군님’은 밤마다 기쁨조에 둘러싸여 파티를 열고, 프랑스산 고급와인과 산해진미를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가 증언을 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다. 은주씨도 이때 받은 배신감을 책에서 언급해 놓았다.

◇먹을 것을 구할 자유도 주지 않은 ‘자애로운 아버지’

-지금의 북한 식량 사정은 어떤가요? 굶어 죽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그때보다는 아사자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확실할 거에요. 그렇다고 생활여건이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1990년대 당시는 배급이 갑자기 끊기면서 사람들이 요령이 없었어요. 장사도 할 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도를 모르고 있다가 그냥 굶어 죽은 겁니다. 하지만 그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조금은 터득하면서 장사를 통해 식량을 얻는 방법을 찾은 것이죠.”

2000년 북한은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국제인권단체는 2000년 이후에도 60만명 이상이 아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내외 인권기구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까지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약 200만명에서 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은주씨 책에는 고난의 행군시기 아사자가 50만명이나 100만명이라고 했는데요.
“어느 국제기구 통계를 인용한 것인데, 아사자 통계는 저도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기준을 잡는 시점에 따라 큰 차이도 나고요. 굶어서 죽는 것도 죽는 것이지만, 못 먹어서 영양실조와 심지어 얼어 죽는 것도 모두 굶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사람이 든든하게 먹으면 쉽게 얼어 죽지 않거든요. 그렇게 계산하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틀린 말은 아닐 거에요.”

김정일은 소위 고난의 행군시기 김정일은 체제유지에 필요한 약 500만 명에게만 식량을 주고, 나머지 주민에게는 배급을 끊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식량을 얻기 위해 탈북한 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사실상 주민들을 굶겨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주민들의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질 때도 김정일은 북한 전 주민을 3년간 먹이고도 남는 옥수수 600만톤을 살 수 있는 돈을 김일성의 시신 보존처리 비용으로 사용했다. 김은주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에서는 굶어 죽을 자유조차 없습니다. 자살을 하는 것도 반역자가 되기 때문에 할 수도 없어요. ‘자력갱생’하라고 했는데 못했으니 그것도 죄라면 죄인 것이죠. 북한 당국은 그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탈출을 한 주민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처벌을 했습니다. 말로는 ‘아버지가 자식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하면서 실제는 그 반대의 행동한 것이죠. 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아버지라면 자식이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식량을 구할 자유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마디로 ‘너는 내 밑에서 죽으라’는 건데 그게 어떻게 아버지입니까.”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는 남한 드라마가 최고”

-당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남한과 미국에서 엄청난 식량이 들어가기 시작했는요.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2% 정도가 남한과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식량을 ‘보았다’고 대답한답니다. ‘받았다’가 아니라 그저 ‘보았다’는 것이죠. 중간에서 간부들이 다 빼돌렸는지 평양에만 주었는지 모르지만, 탈북자 중에 그걸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평양과 지방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입니다. 극과 극이죠.”

-두 번째 탈북을 하고, 왜 바로 남한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우리는 조선족처럼 합법적으로 남한으로 시집을 갈 수도 없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보며 돈을 모았고 2006년 알고 지내는 언니가 친구가 브로커를 소개해주어서 그를 통해 남한으로 온 것입니다.”

-중국에서 팔려간다는 것은 돈을 받고 간다는 뜻인가요?
“탈북자들이 자기가 돈을 받으면 팔려가는 게 아니죠. 인신매매 당사자들은 돈을 구경 못합니다. 돈은 브로커들이 가져가죠.

북에서 온 여자들에게 브로커들이 ‘당신들이 살길은 시집가는 길밖에 없다’고 집요하게 설득을 해요. 그렇게 설득당해서 가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그냥 자기들끼리 어디론가 팔아버립니다. 많은 북한 처녀들이 중국 농촌의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서 갇혀 지내거나, 반강제로 애를 낳고 살고 있습니다.”

은주씨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 몽골에 도착했을 때 21살에 세 번이나 팔려 다니며 애까지 낳은 후 탈출한 여자를 직접 만났다”며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중국에 있는 탈북 여성들의 삶을 더 깊이 절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국제구호 단체가 찍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 어린이와 다를 바가 없다.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가장 좋은 방법이 중국을 통해서 한국의 드라마나 외부 정보를 지속적으로 북한으로 들여보내서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북한 체제를 심하게 비난하는 선전물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지만, 남한의 드라마는 문화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빨리 그리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북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외부 세계랑 비교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 DVD를 사서 보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북한에는 미디어가 지하시장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을 통해서 저렴한 비용 혹은 무료로 남한 드라마를 북으로 되도록 많이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면 최소한 공짜는 아니더라도 더 좀 더 싼 값으로 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으니까요.”

◇통일비용만 생각하는 남한 친구들이 야속하기도

은주씨는 “남한의 또래 대학생들이 북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며 “한편으로 이해는 가지만 서운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탈북자와 북한에 대해서 관심이라도 가지는 친구가 있으면 고마워서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노력합니다. 정작 뉴스에는 북한관련 소식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지만, 우리나라 대학생과 청소년은 북한에 대해 거의 무관심해요. 북한에 대해 듣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주는데 그런 친구가 많지는 않아요. 그 점이 아쉬워요.”

   
 
-남한의 친구들의 통일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친구들과 통일 이야기를 하면 일부 친구들은 대뜸 ‘통일비용’에만 초점을 맞춰요. 이런 모습이 너무 이기적으로 보일 때가 많죠. 서운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씁쓸하다고나 해야 하나. 아무튼 무척 안타까워요. 친구들이 ‘왜 내가 내는 세금으로 통일비용을 부담하느냐. 다음 세대가 하면 되지’라고 말할 때는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은주씨는 “북한은 재건이 필요하고, 우리는 기술력이 있으니까 통일이 되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내수시장도 확보되며, 더욱이 지하자원을 잘 활용할 수 때문에 늦어도 10년이면 북한의 경제가 남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다”며 “젊은 친구들이 통일을 무조건 부담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멀리 보는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기자는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은주씨에게 보여주었다. 은주씨는 “나는 사진이 아니라 북한에 있을 때 매일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다”며 다음과 말했다.

“이모의 아들도 영양실조로 걷지를 못했어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죠. 한국에 와서 마음이 씁쓸한 것이 바로 이런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는 거에요. 깡말라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과 피부색만 다른 것이 지금 북한의 어린이라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먼 곳에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는 도울 수 있지만, 형제·자매인 북한의 어린이는 도와줄 길이 없잖아요. 그 점이 제일 안타깝죠.”

은주씨는 “남한에서 북한과 통일 교육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남한의 학교에서 하는 북한 관련 교육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저 한민족을 강조하는 막연하거나 피상적인 교육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 일부 학교에서 탈북자들을 강사로 활용하는 교육을 진행 중인데, 이것도 교장의 재량에 따라 강의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초중고에서 탈북자들이 직접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의무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은주씨는 “북에서 꽃제비 생활을 할 때 엄마가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며 “엄마가 없었으면 장마당의 유령이 되었을 것”이라며 거듭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드러냈다.
   
▲ 인터뷰 후 은주씨가 서강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북녘땅에서는 은주씨처럼 해많은 영혼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없이 사라지고 있다.

“어머니는 한겨울 추운 바닥에서 잘 때도 항상 저를 끌어안고 주무셨고, 바닥에 작은 비닐이라도 깔아주었어요. 그래서 그나마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부모가 입을 하나 덜려고 자식을 버린 경우가 많은데,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었잖아요.”

은주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와 인권 유린의 현장에 있는 북녘 주민을 생각하면 분통함을 억누를 길이 없다”고 말했다.

“배고픔으로부터 인간으로서 주어진 생명을 지키려고 한 것이 무슨 잘못인가요? 그런데도 탈북자들을 배신자니 뭐니 하며 혹독한 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와 인권이 상실된 비참함을 겪었기에 그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탈북자로서 북한의 인권과 자유를 실현하는데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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