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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60년 만에 만난 90대 노모와 70대의 누나 한눈에 알아봐"
조선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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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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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원식 의원 뒤쪽으로 북에 있는 둘째 누나 우덕혜(원 안)의 사진이 보인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난 9월 25일로 예정됐던 이산가족상봉이 북한의 일방적 연기로 무산된 지도 보름이 되어가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벌써 잊혀졌을지 모르지만 이산(離散)의 한(恨)을 간직한 가족들은 북한의 처사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이산가족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북녘의 핏줄을 만나기만 오매불망 기원하고 있다.

우원식 의원(서울 노원을·민주당)도 북한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던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우원식 의원은 현역 국회의원 중 유일한 이산가족이다. 큰누나와 둘째 누나가 북한에 살고 있다. 우 의원은 북한이 일방적 연기를 통보해왔을 때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화가 난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산가족 상봉이 미뤄져서는 안 되는데.… 상봉자 명단에 포함돼 북의 딸을 만나기만 기다리던 90대 할아버지가 지난 19일 세상을 뜨시지 않았느냐. 이런 이산가족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를 무시하는 북한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는 2010년 10월 제18차 이산가족상봉 때 어머니 김례정(97)씨와 함께 금강산에서 북녘의 큰누이 정혜(74)씨를 만났다. 김례정씨는 헤어진 지 꼭 60년 만에 큰딸을 만났다.

우 의원은 1957년 서울 출생이다. 근데 어떻게 그의 큰누나와 둘째 누나가 북한에 있을까. 당연히 생기는 궁금증이다. 여기서 그의 가족사를 살펴볼 필요가 생긴다.

아버지 우제화(1913~1986)는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다. 대대로 연백에서 살았다. 어머니 김례정(1917~)은 서울 토박이다. 우제화는 연백에서 경성으로 유학와 한성고를 나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김례정은 서울여상을 나와 역시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직장생활을 하던 중 만나 1936년 결혼을 했다. 1937년 장남 영식이 태어났다. 이후 김례정은 1950년 6월 25일까지 5남매를 더 두게 된다. 영식, 정혜, 덕혜, 관혜, 승혜, 인식 2남4녀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38선이 그어졌을 때 황해도 연백군은 38선 이남이었다. 그래서 가족은 연백의 친가를 자주 왕래할 수 있었다.

6·25 남침전쟁이 터져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우제화·김례정 부부는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다. 공산 치하에서 숨을 죽이며 살던 부부는 아이들 여섯 명을 전부 보살피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위로 세 명(영식·정혜·덕혜)을 모두 연백의 조부모에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영식은 14살, 정혜 11살, 덕혜 8살이었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두 딸을 억지로 떼어보낸 게 1950년 7월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이 개입해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하면서 사태가 이상하게 꼬였다. 동쪽에선 북한 주민 10만명이 유엔군을 따라 흥남항으로 몰려 흥남철수가 벌어졌고 이 소식이 황해도에도 전해졌다. 연백의 조부모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중공군이 쳐내려온다는 두려움에 조부모는 자칫 군대에 끌려가거나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연령대의 고모, 삼촌 등 모든 가족을 모두 남쪽으로 피란시키기로 결정했다. 열세 살인 큰손자 영식도 피란의 대상이 되었다. 큰아들 영식이 고모, 삼촌 등과 함께 야밤에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갔다. 이것이 영원한 생이별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전쟁이 끝나고 부부는 삼남매를 더 낳았다. 난혜, 천식, 원식이다. 우 의원은 1957년 부부의 막내로 세상 빛을 보게 된다.

◇ 다리에 착 달라붙어 안 가겠다고 버티는 두 딸에게 사탕 쥐여주며 억지로 보낸 것이 마지막

지난 10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사무실에서 우 의원을 만났다. 그의 방에는 사진 액자가 네 개 걸려 있다. 2010년 이산가족상봉 때 어머니 김례정씨가 큰딸 정혜씨와 포옹하는 장면, 독립운동가였던 외할아버지 김한 사진, 고 김근태 의원 사진, 버스에 탄 채 가족들과 헤어지며 울부짖는 큰누나 정혜씨 사진. 우 의원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1시간 동안 이산가족사(史)를 이야기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산의 슬픔을 간접적으로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어머니는 추석과 같은 무슨 때만 되면 휴전선 근처의 전망대로 가서 북녘을 향해 제를 지내며 두 딸을 그리워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두 딸을 연백으로 보낼 때 있었던 일을 수없이 들었다.

“엄마 아버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정혜와 덕혜는 다리에 착 달라붙어 울었다. 안 가겠다고 버티는 정혜와 덕혜에게 사탕을 쥐여주며 억지로 보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우제화는 평생 북녘에 있는 두 딸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러다 1986년 1월, 두 딸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우 의원은 어려서부터 큰형 영식으로부터 1951년 1·4 후퇴 당시 고향을 떠나온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큰형님이 한밤중에 몰래 고모 삼촌들과 피란을 가는데, 차마 여동생들에게는 얘기할 수가 없어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여동생들이 자기들만 남겨두고 피란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형님을 따라왔대요. 한참을 쫓아왔는데 개울을 만났고, 형님은 개울을 건넜는데 어린 여동생들은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이산가족상봉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두 딸을 만나고 싶어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막내아들이 국회의원이어도 대상자를 추첨으로 선발하는 방법이어서 별 도리가 없었다. 중국을 통해서 딸의 사진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내 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던 2010년 10월 8일이었다. 큰딸 정혜씨가 큰형 영식씨를 찾는다는 소식이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되었다. 정혜씨는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생각을 못하고 큰오빠 영식씨를 찾으려고 신청을 한 것이다. 영식씨는 적십자사를 통해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얘기를 정혜씨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기대하지도 않았던 60년 만의 모녀 상봉이 이뤄지게 되었다.
   
▲ 어머니와 큰누나가 상봉하는 사진 앞에 선 우 의원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2010년 10월 8일 당시 그는 원외였다. 그는 그날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그날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제가 말 그대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사실 94세에 이른 어머니는 기대를 거의 접어가고 계셨거든요. 저는 너무 기분이 좋아 그날 밤 술을 엄청 마셨습니다.”

◇“만날 때는 애끓는 반가움, 헤어질 때는 또 생이별하는 참혹함에...”

이산가족상봉 규정은 여행용 가방으로 2개까지 가족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갈 수 있다. 가족은 정혜씨에게 뭘 선물할지를 놓고 여러 차례 회의를 열었다. 결국 여행용 가방 두 개에 넣기로 한 것은 생필품, 기초의약품, 오리털파카, 옷가지 등으로 압축해 목록을 작성한 뒤 이들을 구입했다. 그런데 상봉일이 다가오면서 우 의원이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그때까지 어머니께서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군사분계선을 지난 금강산에서 상봉을 하려면 버스를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잖아요. 저는 그러다 어머니가 큰일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다 큰일나실지 모른다고 생각해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가다가 죽더라도 가겠다. 60년을 기다려왔는데 내가 못 가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10월 29일, 영식 부부와 원식 부부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결지인 설악산 동해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를 향해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힘들어 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휴게소에서 쉬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집합시간인 오후 2시를 넘겨 이산가족 대상자 중 가장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동해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하니 방송사 카메라와 기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플래시가 터졌고 여기저기서 어머니에게 축하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최고령자이면서 부모자식 간에 만나는 유일한 경우였던 겁니다. 그때부터 어머니 컨디션이 갑자기 좋아지셨어요. 상봉행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아프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셨습니다.”

10월 30일, 금강산 상봉장 면회소로 들어가 가족은 74번 테이블에 앉아 정혜씨를 기다렸다. 그가 “근데 60년이 지났는데 어머니와 형님이 큰누님을 알아보실 수 있을까요?”라고 묻기도 했다. 어머니와 형님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상봉시간인 오후 3시가 되자 저쪽에서 문이 열리고 신청자들이 들어왔다. 남쪽의 가족은 동시에 우정혜를 알아보았다.

“영식 형님이 먼저 ‘저기 정혜다’라고 소리쳤어요. 큰누님은 어머니를 닮았어요. 저도 어머니를 닮았고요. 저쪽에서 한복을 입은 여인이 들어오는데 딱 알아보겠더라고요.(웃음)”

60년 만에 만난 모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누이와 동생. 가족들은 감격해하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정혜씨로부터 가족들은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영식씨가 1·4 후퇴 때 월남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조부모가 작고했다.

그러니 두 딸은 사실상 고아로 자란 셈이었다. 정혜씨는 이미 작고한 남편과의 사이에 2남2녀와 손주들까지 두었고 현재는 연안군 직매점 지배인으로 있다고 했다. 둘째인 덕혜씨는 황해도 재령에서 살고 있으며 73세의 남편과 2남3녀를 두었다고 했다.

60년을 기다려온 상봉이 2시간 만에 끝났다. 그는 첫 상봉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느꼈던 것을 이렇게 말한다.

“팔다리가 모두 쑤시고 몸살 기운까지 갑자기 밀려왔습니다. 내가 이런데 어머니는 오죽 하셨겠습니까?”

10월 31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개별상봉이 이뤄졌다. 가족은 정혜씨와 금강산호텔 715호에서 만났다. 정혜씨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어머니께 큰절을 했다.

“어머니,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정혜야, 네가 이렇게 잘 있어서 고맙다. 우리를 이렇게 찾아주어 정말 고맙다.… 그리고… 너를 떼어놓아 미안하다.”

60년간의 기나긴 이별 끝에 찾아온 사흘간의 짧은 만남.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상봉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북쪽의 신청자를 태운 버스가 떠났다. 모든 상황은 끝났다. 우 의원의 말이다.

“나는 그날 온몸의 관절이 쑤시고 머리가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어요. 뼈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란 이런 거구나 생각했죠. 그때 어머니를 봤어요. 눈을 감고 계셨는데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으셨어요.”

우 의원은 이렇게 말하며 살짝 눈물을 비쳤다. 회상을 듣는 기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만날 때는 애끓는 반가움이 있었고, 헤어질 때는 생이별의 참혹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의 반가움이란 60년 생이별의 한(恨)을 모두 녹일 만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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