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의 유서' 쓴 탈북자 김은주씨]

세 모녀 餓死 직전, 두만강 건너 탈북
한국 오기까지 참혹 했던 중국 생활, 프랑스·노르웨이 잇단 출간으로 화제

"내 이야기, 여느 탈북자와 다를 것 없어…
그들을 대신해 '북한의 실상' 쓴 것뿐, 세계가 탈북자 문제에 관심 갖길 바라"

1997년, 아오지(함경북도 은덕)에 사는 열한 살 소녀 은주는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세상을 뜨자 엄마는 가구와 이불까지 팔아 가족을 건사해야 했다. 더 이상 팔 세간도 남지 않자 엄마는 언니와 식량을 구하러 나진으로 떠났던 것이다. 일주일 만에 빈손으로 돌아온 엄마는 탈진한 딸을 끌어안고 탈북을 결심한다. "이렇게 죽을 바엔 가다가 죽자"는 생각이 있었을 뿐, 계획이 있을 리 없었다. 탈북자 모녀에게 중국에서의 삶은 북한만큼이나 참혹했다.

지난 4일 출간된 '11살의 유서'(씨앤아이북스)는 김은주(27·서강대 4년)씨가 북한을 떠나 2006년 한국에 올 때까지 9년간 겪은 실화다. 은주씨의 이야기는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의 세바스티앙 팔레티 서울특파원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올해 초 프랑스에서 '북한지옥탈출 9년(Cor�e du Nord 9 ans pour fuir l'enfer)'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언론에 화제가 됐고, 이어 노르웨이에서도 출간됐다. 책이 유럽에서 관심을 끌자 역으로 한국에서도 출판됐다.

지난 4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김은주씨가 자신의 책 ‘11살의 유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명원 기자
지난 4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김은주씨가 자신의 책 ‘11살의 유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명원 기자

북한에서 은주씨는 '꽃제비'였다. 세 모녀는 먹을 것을 찾아 유랑했다. 은주씨는 "토끼똥이 섞인 시래기 부스러기를 끓여먹고, 가을철엔 떨어진 낱알을 훔쳐먹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아사(餓死)를 면하려고 두만강을 건넜지만, 기다리는 것은 인신매매범뿐이었다. 세 모녀는 2000위안(약 35만원)에 훈춘의 중국인 집으로 팔려갔다. 엄마는 그 집에서 남동생을 낳았다. 이 '지옥'에선 그래도 굶주리진 않았다.

은주씨는 공안에 붙들려 북송되던 날 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린 2002년이었죠. 포상금을 노린 이웃의 신고로 체포돼 북한에 인계됐어요. 중국인 집에 살며 그래도 고향인 북한을 그리워했었는데… 북한에선 우리를 '인간 쓰레기' 취급하더군요." 모녀는 보위부를 거쳐 노동단련대에 갔다. 엄마는 병을 얻었지만,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했다. 다시 은덕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세 모녀는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북송을 경험한 이후로 언니는 엄마·은주씨와 떨어져 도피 생활을 했다. 함께 있다 몽땅 잡힌 기억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 지옥 같던 훈춘 중국인 집에 다시 가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도망쳐 나와 길가를 떠돌았다. 길에서 공안을 마주칠 때마다 모녀는 무서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엄마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중국에 살며 그 흔한 양꼬치 하나 제대로 먹어본 일이 없었죠." 2006년 모녀는 브로커에게 1인당 2만 위안을 내고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자유를 얻기 위해 4년간 쉼 없이 일해야 했던 셈이다. 언니와도 한국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은주씨는 스물한 살에 고등학교(서울세현고)에 입학했다. "열한 살 이후로 학교에 못 갔으니 수업이 버거울 수밖에요. 쉬는 시간 짬을 내 영어를 가르쳐주신 노재훈 선생님 덕분에 따라갈 수 있었어요." 은주씨는 2009년 서강대에 입학해 중국문화와 심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여느 한국 청년들처럼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지만 그는 "탈북자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책을 출간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훈춘에 있는 남동생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염려도 됐지만, 이 책을 통해 전 세계 많은 사람이 탈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면 바랄 게 없습니다."

은주씨는 자신이 겪은 9년간의 경험이 여느 탈북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죽은 아이를 안고 통곡하던 아주머니, 장마당에서 옥수수 낱알을 줍던 꽃제비들, 한국에 오려다 끝내 몽골 사막에 묻힌 아저씨… 이들에겐 북한의 실상을 알릴 수단이 없습니다. 제가 그들의 이름으로 대신 써내려 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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