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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동방예의지국'
조선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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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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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하러 평양에 갔다. 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하지 않을 거면 올 필요도 없다"고 했다. 금수산기념궁전엔 김일성의 시신(屍身)이 있다. 김 대통령이 평양공항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금수산 궁전 참배 문제는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첫날 백화원초대소를 찾아온 김정일이 김 대통령에게 말했다.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도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고파서 인민들이 (김 대통령을 환영하러) 많이 나왔습니다."

▶김 대통령 일행은 평양에서도 내내 금수산궁전 참배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나온 김정일의 '동방예의지국' 발언은 일행을 더욱 고민스럽게 했을 것이다. 김정일은 고도의 정치적인 문제를 민족 정서와 연결된 예의(禮儀) 문제로 바꿔버리는 노회함을 발휘했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압박하고 자신의 도덕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그래도 김 대통령 일행은 금수산궁전에 가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렸다. 중국이 먼저 이 말을 썼지만 우리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고 즐겨 사용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책 '산해경'은 "동쪽에 군자의 나라가 있는데 항상 옷을 바르게 차려입는다. 서로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의 칭찬이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중화 민족이 변방 민족을 길들이려고 상대를 띄우는 수법이라는 얘기다.

▶19세기 조선을 넘보려고 서양 배 이양선(異樣船)이 한반도 해안에 나타나자 조정은 뱃길 잃고 표류하는 배로 알고 물과 식량을 갖다 주기도 했다. 상대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베푸는 이런 형식적 예의는 때로 무지(無知)와 어리석음이라고 조롱받기도 한다.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가 한 달간 머물며 금수산궁전을 참배하고 각종 행사에 참석했던 사람에게 법원이 "참배는 무죄"라고 선고했다. 법원은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평소 이념 편향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의 단순한 참배 행위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례적 표현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다"고 했다.

▶북한 통신이 자주 배포하는 사진 속에서 김정은은 할아버지뻘도 더 될 것 같은 북한 고위층 수행원들 앞에서 혼자만 담배를 물고 뭔가를 지시하는 모습이 많다. 노인네들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경청 자세를 취하거나 수첩을 꺼내 들고 손자뻘 김정은의 지시를 열심히 받아 적고 있다. 법원이 이런 북한과 관련해 '동방예의지국'을 들고 나오니 어리둥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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