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운 산업부 기자
이혜운 산업부 기자

올 초 개봉한 영화 ‘베를린’에는 무려 716만명의 관객이 몰렸습니다. 올들어 지금까지 박스오피스 전체 순위(17일 현재) 4위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주독(駐獨) 북한대사 리학수 역을 맡은 배우 이경영의 북한말 연기가 어색하다는 일부 지적이 있었습니다. 연기파 배우 이경영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말이겠지요.

개인적으로 배우 이경영을 알지 못해 ‘어색한 북한말’이 의도한 연기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리시홍 주독북한대사를 모델로 삼았다면 오히려 이경영의 연기는 완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시홍은 어릴 적부터 유럽에서 유학하고 근무해 온 인물로 북한에서 ‘해외파’로 분류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베를린'의 이경영 전지현 하정우 모습
영화 '베를린'의 이경영 전지현 하정우 모습


◇명품 백화점·명품 로드샵 즐비한 번화가에 있는 주독 북한 대사관 건물, 이유는?

독일 외교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리시홍은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근무를 해왔습니다. 유럽 생활만 20년 넘게 했기 때문에 외국어 구사가 완벽할 뿐 아니라 매너나 사고방식도 유럽식이라고 합니다.

제가 봤던 리시홍도 북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풍채 좋은 한국 기업 회장님 이미지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선지 깔끔하면서도 부유한 느낌이 나는 이경영은 제가 아는 실제 주독 북한대사에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외교관이 되려면 평양외국어대, 김일성종합대 외국어문학부, 국제관계대 등 3개 대학 중 한 곳은 나와야 한다고 합니다. 외교관 희망자 중 적격자로 판단되는 사람을 중앙당에 추천하면, 중앙당 간부 1과(課)가 이들의 성적과 출신성분 등을 종합 검토해 심사한 뒤 일정 수를 추려 외무성에 명단을 넘긴다고 합니다.

신원 조사 결과 직계 8촌, 외가 4촌, 처가 8촌 중 월남자나 반(反)혁명분자가 드러나면 외교관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철저한 신원 조사를 통과한 사람들만 대상으로 어학시험 등을 실시해 최종 선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공산당 고위간부 자녀들이 외교관을 많이 하며, 베를린 주재 북한 외교관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영화 ‘베를린’에 묘사된 부분 중 확실히 잘못된 것 중 하나는 표종성역의 하정우와 련정희역의 전지현이 직장인 북한 대사관으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것입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대부분 대사관 내 아파트에서 생활합니다. 일부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들은 주요 인물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표종성처럼 권력 핵심에 있는 사람이 외부에서 대사관으로 출·퇴근을 하는 건 잘못된 묘사라는 것이지요.

베를린 연수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제가 직접 가본 북한 대사관은 베를린의 가장 번화한 거리인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근처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독일이 통일 후 계획적으로 개발한 곳으로 프랑스 명품 백화점인 라파예트가 들어와 있고, 각종 명품 로드샵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초호화 호텔과 클럽들도 많아 주말 밤이면 드레스를 입고 밍크코트를 걸친 사람들이 리무진에서 내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 주독 북한대사관이 위치하게 된 것은 독일 통일 덕분입니다. 북한은 동독과 교류를 아주 오래동안 했기 때문에 북한대사관도 동독 지역에 있었습니다. 대사관 규모로는 옛 소련 다음으로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치가 베를린 시내를 기준으로 볼 때, 서독에 가까운 곳에 있다보니 과거에는 경비 문제 등으로 인해 썩 좋은 입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서독과 동독이 통일하면서 주독 북한대사관 주변 일대가 서독쪽에 인접한 장점 등으로 가장 화려한 거리로 변신한 것입니다. 대사관 앞에서 인권 관련 시위를 하러 온 외국인들이 가장 놀라는 부분 중 하나 역시 화려한 거리에 있는 잿빛 대사관인 주독 북한대사관 건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독 북한대사관이 그 위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주독 북한대사관은 호스텔과 강당 임대 사업을 하고 있는데 위치 덕에 호스텔은 늘 예약이 꽉 차있고, 대사관에서 하는 강당 임대 사업도 활발하다고 합니다.

왼쪽부터 김평일, 김한솔(일본 후지TV가 촬영한 영상을 캡처), 김정은
왼쪽부터 김평일, 김한솔(일본 후지TV가 촬영한 영상을 캡처), 김정은


◇“독일주재 북한 대사관이 전 세계 북한 공관들을 먹여살린다?”

북한은 기독교를 믿으면 처벌받는다고 하지만 제가 있던 2011년 크리스마스 때는 호스텔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주독 북한대사관은 전 세계 북한대사관 중 가장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전 세계 북한 공관들을 독일 주재 대사관이 먹여 살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 내에서는 “주독 북한대사는 김정은 빽으로도 못 오는 곳”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감히 바라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가 김정일의 이복(異腹) 동생인 김평일이지만,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의 위상은 김평일이 있는 폴란드주재 대사관보다 더 높다고 외교 소식통들은 전합니다.

러시아 등 외국 주재 북한 대사관들은 주로 마약밀수 등을 통해 ‘외화벌이’를 합니다. 그런데 유독 독일 주재 북한 대사관은 아직 그런 불법 행위로 걸린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임대 사업으로도 충분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건물 1개동을 호스텔로 임대해준 상태이고, 다른 건물 하나에도 심리치료 센터 등 15개 기관이 입주해 세(貰)를 내고 있습니다.

대사관 위치가 훌륭하다 보니 학군(學群)도 양호합니다. 북한 외교관 자녀들은 대사관에 살면서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이곳이 바로 독일 정·관계 인사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이기 때문이지요.

공립이지만 지리적 위치상 정계(政界) 자녀들이 많이 다닌다고 합니다. 독일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북한 대사관 직원들도 자녀 교육에 극성이라고 하는데요. 학부모가 참석해야 하는 학교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밀고 유창한 독일어로 다른 학부모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2년 전 보스니아 모스타르 국제학교에 다니던 김정일의 장손 김한솔을 만났을 때 북한에 대해 묻자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도 잘 몰라요. 언론에 나온 정도 밖에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학교에 다니며 생활을 했고 북한에는 자주 들어가지 않으니 외신으로 접하는 북한의 이미지가 자신이 직접 본 북한의 이미지보다 더욱 강하다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자란 김한솔은 프랑스 최고 명문인 프랑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 최근 입학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어린 시절 스위스 베른에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이 다닌 리베펠트 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의 율리 스투더 교장은 “스위스에서 받은 민주주의 교육이 북한 통치에 좋은 영향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김한솔에게 전 세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그런 부분일 것입니다.

영화 ‘베를린’처럼 북한대사관 안에서 어떤 권력 암투가 벌어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의 자녀들은 북한의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고 자라고 있다는 겁니다. 최소한 독일에서 우수한 선진 교육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북한 지도부가 됐을 때의 북한은 지금과 훨씬 달라지기를 기대한다면 너무 비현실적인 ‘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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