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대남 기관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21일 대변인 성명을 내고 나흘 앞으로 다가온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무기 연기한다고 밝혔다. 조평통은 "우리의 성의로 이뤄진 북남 관계 진전을 (박근혜 정부의 대북) 원칙론의 결과로 광고하는 것은 파렴치한 날강도 행위"라며 "남조선이 북남 관계를 악용하는 한 초보적 인도주의 문제도 올바로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평통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이 내란 음모 혐의로 구속된 데 대해 "통일 애국 인사들에 대한 야만적 탄압 소동"이라며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정상적 대화와 북남 관계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도 했다.

북한의 일방적 이산가족 상봉 연기 발표는 반(反)인륜 행위다. 남측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96명은 대부분 80대 이상 95세에 이르는 고령자이다. 그중 91세 김영준씨는 지난 19일 세상을 떠났다. 북한은 혈육 만나기를 애타게 기다려 온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상봉 연기 소식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는가.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연기 이유로 두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지금의 남북 관계 개선은 자기들이 주도한 것인데도 남측이 박근혜 정부의 성과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거꾸로 대결 책동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작년 말부터 핵·미사일 실험을 강행하고 갖은 대남 도발 위협을 일삼으면서 반년 가까이 위기 국면을 이끌어 온 데 대해선 사과나 해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자기들의 선의(善意)로 남북 관계가 나아졌다는 희한한 논리를 펴고 있다.

둘째, 북한은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와 억지로 연결하고 진보 민주 인사들을 '용공' '종북'으로 몰아 탄압하는 '마녀사냥극'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지난 한 달여 이석기 사건에 대해 사실상 침묵하다 갑자기 이 문제를 이산가족 상봉에 갖다 붙였다. 남측 종북 세력의 항의라도 받았다는 얘기인가. 북한은 걸핏하면 '반(反)공화국 사건'이라는 것을 만들어내 수십만 주민을 재판 없이 수용소에 보내고 즉결 처분해 왔다. 장관 등 요직 인물도 이런 식으로 공개 처형했다. 그러나 북한을 떠받들며 대한민국에 저주를 퍼붓고 북의 도발에 맞춰 사용할 총기와 폭탄 제조법을 모의했던 이석기와 자칭 혁명 조직 RO는 대한민국 법 절차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북한은 성명에서 이산가족 상봉 '취소'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예리하게 주시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다시 남북 관계를 대결 국면으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더 큰 양보를 얻어내려는 전술적 조치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원하는 미국과의 직접 대화·협상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김정은이 역점을 둔 금강산 관광 재개도 여의치 않자 이산가족 상봉 연기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북한은 말 그대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정부는 북의 도발까지 포함한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