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전기를 맞이함에 따라 정치, 안보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아이디어와 구상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한미군의 역할을 유엔평화유지군으로 바꾸자는 안은 안보상의 민감성에 비추어 그 허실이 명백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주한미군에 관한 논의는 첫째 현상유지, 둘째 감축 내지 철군, 셋째 미군의 역할 변경 등 세 가지 방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현상유지론은 남북관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한·미간의 안보협력의 틀에 손을 대서는 안되며, 주한미군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시각(김 대통령의 견해)에서부터 적어도 북한의 안보 위협이 없어질 때까지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포괄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감축 내지 철수 주장은 일부 의식층에 의해 제기되어 왔고, 근자에는 노근리 ‘학살’과 매향리 사건, 독극물 방류 및 SOFA개정 문제 등과 연계되어 반미감정을 자극하면서 북한의 개혁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과 더불어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주한미군의 역할을 유엔평화군 체제로 바꾸자는 견해는 언뜻 보기에는 국제 평화를 목표로 하는 유엔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미군 철수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처럼 오해될 수 있다.

미국의 소위 일부 ‘진보적’ 논자들도 냉전체제의 붕괴는 러시아와 북한의 동맹관계를 해소했고, 또 중국마저도 남북한에 대해서 ‘등거리 외교’와 ‘정직한 브로커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미국도 주한미군의 역할을 변경,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미 정부당국은 그러한 주장이 냉전 후에도 존속하는 북한의 위협에 비추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최근 이 견해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다시 제기되고 있는 이유는 북한 당국이 비공식적으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수용 용의를 시사해왔고, 또 6·15 선언이 ‘주체적 통일노력’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북한의 주한미군 수용의 전제는 미군의 역할 변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과거 반세기 동안 일관되게 주장해 온 미군 철수가 국제환경의 변화로 더욱 어려워지자 우회적인 방법으로 미군의 억지력을 제거함으로써 사실상 철군의 효과를 달성하겠다는 기도이다.

잘 아려진 바와 같이 유엔 평화유지활동은 과거 50여 년동안 유엔이 국제평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해 온 방편으로서 휴전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고 평화건설에 참여함으로써 캄보디아 등 나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의 창설과 활동이 오직 유엔 안보리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권력정치의 한계가 노출되고 있으며 또 소말리아, 앙골라 등 지역에서는 평화유지군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계속되고 있으나 유엔은 속수무책이다.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이 4강의 이해가 예리하게 교차하는 한반도에 도입될 수 있다는 착상은 한반도의 안보 문제에 유엔을 끌어들여 다자화함으로써 미군의 억지력을 없애고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교란하겠다는 뜻이다.

또 평화체제 구축과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를 대가 없이 미리 포기하는 결과를 갖고 온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없다.

주한미군 역할 변경 논의와 관련하여 지적할 점은 그들이 주한미군의 철수나 역할 변경을 강조함에 있어 남북한에 부여하고 있는 도덕적 등가성(Moral Equivalence)의 문제이다. 남과 북의 체제 성립 과정과 각 체제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남북한을 도덕적으로 같은 차원에서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피땀 흘려 이룩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신념과 국제적 평가를 우리 스스로가 훼손하는 결과를 갖고 올 것이다.

/ 박 수 길 고려대 석좌교수·한국유엔체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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