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은 4일(현지 시각)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북한이 엄청난 양(量)의 화학무기를 갖고 있다"며 "최근 김관진 한국 국방장관을 만나 대응 방안에 대해 장시간 논의했다"고 말했다. 미국 국방장관이 북한의 화학무기에 대해 '엄청난 양'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의 화학무기는 2000년대 들어 북핵(北核)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미가 가장 우려했던 북의 대량살상무기(WMD)는 화학무기였다. 북한은 1961년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인 화학무기 개발에 나선 이래 북한 전역에 화학무기 제조 및 보관 시설을 운영해 왔다. 우리 국방부는 2012년 국방백서에서 북이 2500~5000t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북한은 화학무기 보유 규모에서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다.

헤이글 장관은 "미국이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북한·이란 같은 정권들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려고 덤벼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2년 반 넘게 내전을 치르고 있는 시리아 정부군은 지난달 21일 민간인 마을에 사린가스로 추정되는 화학무기를 탑재한 로켓을 발사했다. 이 공격으로 어린이 400여명을 포함, 1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7년 발효된 유엔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세계에서 북한·시리아 등 5개국뿐이다.

미 국방부는 올해 초 발간한 북한 관련 보고서에서 "북한은 신경·수포·혈액·구토작용제 등 다양한 화학무기를 갖고 있으며, 대포와 탄도 미사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휴전선에 배치된 장사정포나 단거리 미사일에 화학무기탄을 실어 대한민국을 공격할 수도 있고, 남파 간첩을 통한 화학전도 배제할 수 없다. 미 연구기관의 2004년 보고서는 탄저균 10㎏을 서울에 살포하면 반경 30㎞ 이내의 90만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산했다.

북한은 언제든 대한민국에 대재앙(大災殃)을 초래할 수 있는 핵·화학무기·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3종(種) 세트를 갖춰가고 있다. 정부는 북핵과는 별개로 북한의 화학무기 문제를 다룰 국제 협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화학무기 공격에 대비한 우리의 방어 태세도 전면 재점검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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