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계 경찰 역할에 피로감 드러내
세계 3위의 화학무기 보유한 北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 이제 각자도생 준비해야 하나

박두식 논설위원
박두식 논설위원
김관진 국방장관은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다. 북한은 김 장관을 부를 때 온갖 욕설을 서슴지 않는다. 북한이 대남 위협을 한창 끌어올리던 지난봄엔 "(남한) 타격 시 김관진은 첫 번째 벌초 대상"이라고 했다. 그러고도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듯 북한군은 김 장관을 표적으로 걸고 사격 훈련을 하고, 김 장관 사진을 붙인 허수아비를 군견이 물어뜯게 했다.

그런 김 장관이 또 한 번 북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일을 했다. 최근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을 만나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 사태를 그냥 넘기면 북한의 오판(誤判)을 부를 수 있다며 '시리아 제재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한·미 국방장관 회담 후 미국은 연일 '북한 오판론'을 거론하고 있다.

시리아는 2년 8개월 가까이 내전(內戰)을 치르고 있다. 전체 인구의 10% 가까운 200만명이 시리아를 떠났고, 사망자 수가 10만명을 넘었다. 지난달 21일 새벽엔 수도 다마스쿠스 교외에 화학무기를 탑재한 로켓 공격까지 벌어졌다. 13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 중 400명 안팎이 어린이다. 유엔 조사단은 사린 가스 공격으로 추정했다. 1995년 일본의 사교(邪敎) 집단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 습격 때 사용했던 그 독가스다.

미국은 작년 이맘때 시리아를 향해 '화학무기 사용'은 절대 넘어선 안 될 선(레드라인)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정작 시리아가 이 레드라인을 넘자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에 대한 무력 제재에 앞서 의회의 동의를 받겠다고 했다. 미국 대통령이 군사행동에 앞서 의회 '승인'을 요청한 것은 반세기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미국 못지않게 시리아 응징을 주장했던 영국 캐머런 총리 역시 영국 의회가 시리아 무력 제재안을 부결하자 곧바로 뜻을 접었다. 영국 언론은 "세계 이슈에 영국이 관여하는 것을 당연시해온 제국의 시대가 끝났다"고 했다. 미국 의회가 시리아 무력 제재에 반대할 경우 화학무기·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사용을 금지해온 세계적 질서가 무너질 위기를 맞게 된다.

화학무기는 핵무기 못지않은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다. 나치 독재자 히틀러가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보내 대량 학살하면서도 막상 전장(戰場)에서 화학무기 사용을 승인하지 않았을 만큼 공포의 대상이다. 유엔이 1992년 만든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시리아·앙골라·남수단·소말리아 등 5개국뿐이다.

미국과 유엔 등은 시리아가 1000t 안팎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북한은 2500t 이상의 화학무기를 갖고 있다. 미국·러시아에 이어 셋째로 많다. 화학무기는 꼭 미사일이 아니라 대포로도 쏠 수 있다. 북한은 휴전선을 따라 1100여문(門)의 장사정포를 배치해 놓고 있다. 우리 내부의 종북 세력이 운반 수단을 자처할 가능성도 있다. 옴진리교도들이 뿌린 소량의 사린가스 때문에 13명이 죽고 6000명 가까운 사람이 중경상을 입었다. 화학무기를 핵보다 더 두렵게 여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미국 랜드연구소 브루스 베넷 박사는 2004년 보고서에서 북한이 맑은 날 밤에 수도권에 탄저균 10㎏을 살포할 경우 반경 30㎞ 안 90만명, 사린가스 1t은 반경 7.8㎞ 내 23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우리가 시리아 사태를 심각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꼭 화학무기의 위력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규모의 공동체든 법을 집행하고 규범을 강제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하면 칼은 무기가 아니라 유용한 도구가 된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국제사회에선 미국이 그 역할을 해 왔다. 좋든 싫든 세계의 경찰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갈수록 이 일을 힘에 부쳐 하면서 강한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시리아 사태는 미국의 퇴조(退潮)를 알리는 신호로도 읽히고 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오바마가 막판에 시리아 무력 제재 결정을 미루자 내각 전체에 '함구령'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국경을 맞댄 시리아에서 벌어진 화학무기 사용을 놓고 미국 등 세계가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필요성을 절감한 듯한 눈치다. 지금껏 행동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이스라엘의 묘한 침묵이다. 시리아 사태는 간과할 수 없는 세계 흐름의 큰 변화를 담고 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