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봄 춘천 가까운 '말굽 능선' 전투에서 미 해병 800명이 중공군 2400명과 맞섰다. 미군은 이틀을 버티다 밀렸다. 미 해병 1연대 1대대 A중대 소총수 론 브라워드는 기관총 사수 워런 래릭과 관목 우거진 산비탈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다. 아군 탱크 뒤에 몸을 숨겼으나 래릭은 등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브라워드도 크게 다쳤다. 둘은 캘리포니아 고향 친구였다. 래릭은 스물한 살, 브라워드는 열여덟이었다.

▶양조업으로 성공한 브라워드는 한국에 열한 차례나 왔다. 래릭의 유해를 찾으려고 애가 탔다. "현충일이 따로 없지요. 매일 래릭을 생각하니까요." 그는 다른 유해를 서른다섯 구나 찾았지만 끝내 래릭은 못 찾은 채 올 5월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1951년 뉴질랜드 참전 용사 돈 고언도 경기도 가평 210고지 전투에서 전우 둘을 잃었다. 그는 전우 주검을 끌어안고 "꼭 다시 돌아와 안부를 묻겠다"고 했다. 몸이 아팠던 그는 2006년 심장 수술을 받고서야 한국에 왔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다.



▶토머스 허드너는 6·25 때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는 미 해군의 첫 흑인 조종사였던 제시 브라운과 짝을 이뤄 임무를 수행하는 '윙맨(wingman)' 사이였다. 둘의 전투기는 1950년 12월 4일 오후 개마고원 장진호 부근에서 고도 210m로 낮게 날았다. 미군 1만5000명을 에워싼 12만 중공군의 동태를 정찰하고 있었다. 2시 40분 브라운이 모는 코르세어 전투기가 대공 사격에 맞았다.

▶브라운은 계곡에 불시착했고 기체가 부서졌다. 허드너도 자기 전투기를 근처에 억지로 착륙시켰다. 브라운의 다리 하나가 기체에 눌려 꼼짝도 안 했다. 눈을 퍼서 기체 불부터 껐다. 브라운의 다리를 빼내려 했으나 허사였다. 구조 헬기가 왔다. 브라운의 다리를 자르고 몸을 뺄까 했으나 브라운은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헬기 조종사는 어두워지기 전에 떠야 한다고 했다. 브라운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내 데이지에게 전해줘. 사랑한다고."

▶허드너는 그 자리에서 브라운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62년 7개월이 흘렀다. 지난 20일 허드너가 약속을 지키려고 북한 땅에 들어갔다. 1주일 동안 장진호 부근에서 브라운의 유해를 찾는다. 그는 내일모레면 구십객이다. 2009년 국군 해병대 출신 탁학명도 6·25 때 경북 팔각산 전투에서 숨진 전우 유해 네 구를 찾아냈다. 노병들은 전우의 뼛조각을 찾지 못하면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숙연하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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