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어부와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 탈북 후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했던 남녀 탈북자 3명이, 8일 일본 도쿄(東京)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짐승과 다를 바 없었던 자신의 체험들을 공개했다. 다음은 증언 요지. / 편집자



◆ 이재근(1970년 납북, 1998년 8월 탈북, 2000년 귀순)
1970년 4월 29일 새벽. 나를 포함해 27명의 선원이 탄 봉산호는 백령도 서남쪽 30마일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 해주항으로 끌려갔다. 우리는 북한연안을 정찰하라는 임무를 받고 왔다며 간첩죄로 몰렸다. 5개월 후 20명의 선원은 남한으로 송환됐으나, 나를 포함한 7명은 간첩 양성기지인 중앙당 정치학교에서 지옥훈련을 받았다. 난 사상(思想)에서 불합격을 받아 사회로 배출돼, 28년간 인간 이하의 고생을 했다.

북한은 한국 어민들만 해도 500명 넘게 납치, 억류시켰으며 해군이나 여름방학에 바닷가에 있던 학생들도 납치했고, 유학생들까지 마구잡이로 잡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석방된 사람들에 의하면, 6·25 당시 포로로 억류됐던 미국·영국군 장교들이 탄광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 이영국(요덕 수용소 출신, 1999년 3월 탈북, 2000년 귀순)
1994년 탈북했으나, ‘남한 대사관원’으로 위장한 북한 안전원에게 속아 북한으로 끌려가 요덕 수용소에서 5년간 수감됐다. 수용소는 사방 4m 높이의 전기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으며, 수인(囚人)들은 하루 120g(한끼 40g)의 옥수수 죽만 먹고 15~16시간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이가 다 빠지고 키가 줄어드는 심한 영양실조 증상이 나타나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얼굴과 온몸이 부어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소금, 부싯돌, 말린 쑥 등의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 도주 기도 분자로 몰려 총살당하거나 교수형, 또는 생매장시켜 죽인다.

생체실험으로 희생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국군포로의 아들이었던 정현수(당시 26세)와 황해북도 청단군 군당책임비서의 아들인 리청근(당시 36세) 등 적지 않은 이들이 건장한 몸이라 하여 생체 실험실로 끌려가 죽었다. 생체 실험실은 남포시에 있으며 6·25 전쟁 중 국군포로를 실험 대상으로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 정춘화(여·1998년 탈북, 2000년 귀순)
1998년 11월 초 중국으로 탈출할 때만 해도 팔려간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렵사리 연길을 거쳐 둔화에서 선양으로 가려다, 중국 공안에 발각돼 도망치다 혼자 남게 됐다. 길가에서 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조선족 남자에게 시집가 고생하다가 2000년 5월 다롄으로 도망쳐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던 중 서울로 왔다.

북한 여성들이 중국인들에게 팔려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가 없다. 달아날까봐 손과 발을 꽁꽁 묶어놓고 화장실 갈 때에도 따라가고 전혀 바깥출입을 시키지 않는다. 조선족에게 시집가도 구박과 멸시, 온갖 술주정을 다 받아야 한다. 식당주인이 남자인 경우에는 자기가 실컷 데리고 놀고, 어떤 경우에는 다른 데 팔아치워 사기 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많다. 만약 도망쳤다가 그 집 식구들한테 들키는 경우에는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 도쿄=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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