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 인사들의 입에 ‘전쟁’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5일 “7000만 민족을 전쟁의 위협 앞에 놓이게 해선 안 된다. 최소한 전쟁분위기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전쟁상황이 일어날 때의 엄청난 피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언급은 한·미 정부 간에 햇볕정책에 대한 이견이 노출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으로, ‘햇볕정책 아니면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그의 인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햇볕 아니면 전쟁 위기’라는 이 인식은 김 대통령뿐 아니라 현 정권 인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같은 날 민주당 김근태 고문도 국회 대표연설에서 ‘햇볕=평화’ 등식을 강조하면서 “햇볕정책을 흔들지 말라”고 요구했다. “금강산관광이 없었으면 서해교전 때 전쟁이 났을 것”이란 말은 현 정권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고, 이들은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야당을 향해서는 “그렇다면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반박하고 있다.

햇볕정책이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한 요소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야당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햇볕정책만이 평화의 관건이고, 햇볕정책이 사라지면 곧장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올 것이란 인식은, 설사 그것이 정치적 과장법이라 해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무엇 아니면 전쟁 위기’란 식의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면 국정의 방향이나 우선 순위에 이상이 오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김 대통령을 만난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김 대통령이 대북 문제에만 빠져있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결코 정상일 수가 없다.

‘햇볕 아니면 전쟁’이라면,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전쟁을 하자는 세력’이 된다. 우리나라에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햇볕정책 아닌 다른 대안을 전쟁으로 가는 길로 몰아붙이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남남 갈등만 격화시킬 것이다.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햇볕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군사적 억지가 실패했거나, 어느 한쪽이 오판한 결과일 것이다. 군사적 억지의 실패나 오판은 햇볕정책 하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독일의 소련 침공 등 역사적으로 허를 찌르는 전략적 기습은 오히려 ‘햇볕’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일어났다. 서해교전 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금강산관광 때문이 아니라 군사적 억지가 튼튼했고, 북한이 오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은 상식이다.

‘햇볕정책이 전쟁을 막는다’는 논리는 정권측 인사들에 의해 “금강산관광 지원비용이 국방비의 몇 %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햇볕정책’이 국방의 일부를 대체하고 있다거나,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위험하며 햇볕정책에 드는 비용과 국방비는 그렇게 비교될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심지어 정권측 인사들은 “햇볕정책이 없으면 전쟁위험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 오지 않고, 와있는 투자도 떠날 것”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는 햇볕을 보고 한국에 오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보고 온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핵심인사들이 “(햇볕정책이 아니면) 주식시장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며, 정책입안자들이 민감한 시장을 대하는 자세는 더더욱 아니다.

앞으로 한반도에 1992년 북한 핵 위기를 능가하는 긴장고조 상황이 다시 올 수도 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켜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던져질지도 모르고, 햇볕정책적인 발상과 접근법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배타적 도그마로 만들거나, “이 업적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나라에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
/ 양상훈 정치부 차장 jhy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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