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고려대 교수·국제정치학
한 순간에 수천 명의 생명을 빼앗아간 작년 9월 11일의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는 미국 으로서는 사상 최대의 비극이었고 동시에 치욕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또한 미국인들을 불안과 분노 속으로 몰아넣었다. 미국 경제의 상징인 WTC의 쌍둥이 건물들이 잿더미로 변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외국인들도 큰 충격을 받았으나 피해 당사자인 미국인들의 강한 보복심과 응징 결의를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9·11 테러 직후 부시 대통령이 미국은 테러집단뿐만 아니라 테러를 지원, 또는 비호하는 세력도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미국의 테러전쟁에 협조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적과 동지로 양분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현재 미국인에게는 이러한 부시독트린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지난 1월 29일 부시 연두 국정연설의 ‘악(惡)의 축(軸)’ 발언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느 형태로든 국제테러와 연결되어 있다는 미국의 정서와 사고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악의 축을 이루는 나라로 북한을 비롯하여 이란과 이라크를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 초점은 이들 개별국가보다는 테러와의 전쟁 자체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은 과거에도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의 확산방지에 정책적 최우선 순위를 두었으나 9·11 이후에 이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러한 무기가 테러집단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1차적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무력분쟁 방지나 적성국들과의 화해 추구보다는 테러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북한은 대량살상무기의 의혹과 미사일 문제뿐 아니라 과거 테러와의 연계가능성 때문에도 미국의 요주의 대상이 되어 왔다. 따라서 북한은 9·11 테러 이후 이라크와는 달리 테러사건과 거리를 두고, 그것에 대해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반 테러 전쟁에서 미국과 협조하여 미국의 호의를 얻는 기회를 활용하지는 못했다. 대량살상무기나 테러문제에 있어 좀더 적극적인 협조의 모습을 보이지 못함으로써 이라크·이란과 함께 ‘악의 축’ 3개국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경우와는 달리 미국이 북한을 무력공격하려는 명분을 쌓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을 개발,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핵사찰 수용, 미사일·생화학무기 협상 등 대량 살상무기 문제 해결에 협조하라는 것이다. 셋째, 미사일의 실험, 대량살상무기와 그 기술의 수출 등 반 테러 전쟁에 역행하는 행위를 중지하라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을 때 그것은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수출에 있어서 강도 높은 경고를 보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만일 북한이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 수출을 중단하지 않는 경우 그것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햇볕정책을 지상의, 그리고 유일한 방안으로 갖고 있는 우리 정부가 이러한 상황진전에 당황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미국에 북한과 대화를 재개할 것을 종용해 왔고 북한이 협상을 할 만한 상대라는 점을 역설해 왔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보다 이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미국에 한반도에서 모든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설득하는 것이다.
혹시나 우리가 북한의 의도를 우리의 편의대로 해석한다거나 대량살상무기 등의 위협을 과소 평가하는 경우 이것은 우리 자신의 안전은 물론 우방에 대해 우리의 신빙성마저 훼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9·11 이후 국제정치의 게임과 룰이 크게 달라진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