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 경제부진 만회위한 '처방전'
김정일 주도 군사 작전식 증산투쟁 벌여


김일성은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8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0대 전망목표'라는 것을 제시하고 당창건 30주년이 되는 75년 10월까지 이의 무조건 달성을 요구했다. 김일성이 제시한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0대 전망목표'는 북한이 6개년 계획기간(1971∼76) 완수를 목표로 작성한 10개 항목의 지표로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설정한 당초 목표보다 2∼3배로 상향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6개년 계획의 4년 차에 해당하는 그해 하반기에 들어서도 경제가 전반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자 김일성은 10월 초 당중앙위 정치위원회를 소집해 대책을 내놓으라며 간부들을 채근했다. 아무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한동안 침묵과 긴장만이 흐르는 가운데 김정일이 조용히 일어나 "당중앙(김정일)이 당조직을 발동해 제기된 경제난국을 풀어보겠다"며 해결사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날 김정일이 당중앙위 정치위원회 위임을 받고 내놓은 처방전이 바로 '70일 전투'이다.

70일 전투는 74년 10월 21일부터 연말까지 70일간 한시적으로 전개하는 증산투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정일은 10월 9일 당·정 간부협의회를 열고 간부들의 분발과 역할배가를 촉구하는 것으로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이어 70일 전투 지휘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과 생산단위에 지도소조를 파견했으며, 12개 중앙예술단과 48개 지방예술단 소속 예술인들, 전문선전일꾼들과 강사·선동원들로 구성된 경제선동대를 생산현장에 보내 증산투쟁을 독려했다.

전국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충성의 돌격대'가 조직돼 탄광·광산·수송부문을 지원했고, 김정일 자신도 집무실을 '70일 전투 총사령부'로 삼고 매일 진척상황을 점검하면서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는 등 목표달성에 전력투구했다. 74년 하반기 북한은 하나의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70일 전투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북한은 '70일 전투'를 통해 공업생산은 이전에 비해 1.7배로 높아졌으며 1974년 공업생산은 전해에 비해 17.2% 늘어났다고 밝혔다. 김정일은 70일 전투의 성과를 인정받아 이듬해 2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6개년계획 첫해인 1971년 새해 벽두 100일 전투에 이어 1974년 70일전투를 벌이고도 6개년계획을 끝내 완수하지 못했다. 특히 강철(1200만t)과 시멘트(2000만t) 생산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1977년 한해를 '완충의 해'로 설정해 추가 생산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됐다.

김정일이 70일 전투를 벌이면서 적용한 경제난국 타개방식은 인민들의 혁명적 열의를 최대한 발동시키는 '사상전'과 경제건설에서 속도를 중시하는 '속도전'이었다. 가용한 자원과 투자 여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주민들의 사상의식에 의존해 최단 시일 안에 생산성 증대를 이룩해 보겠다는 사상전과 속도전은 이후 김정일식 경제운용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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