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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관계와 한반도 안보 상황을 상징하는 개성공단은 김대중 정부 시절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에게 공단 개발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남북 화해 모드를 위한 ‘햇볕정책’의 상징이자 출발이었던 셈이다.

2000년 8월 당시 현대그룹과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6600만㎡(약 2000만평) 규모로 공단을 개발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2003년 6월 부지조성 공사에 들어갔다.

개성공단산(産) 제품이 처음 생산된 것은 2004년 12월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이때 리빙아트가 ‘통일냄비’ 1000세트를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2006년 10월 시범단지에 입주한 23개 기업이 본격적인 제품 생산에 들어갔다. 2007년 6월에 이어진 개성공단 2차 분양에는 평균 2대 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당시 남북 정상이 3통(통관·통행·통신) 문제 해결에 합의하고, 경의선 열차 운행이 시작되며 남북 간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며 개성공단 사업도 탄력을 받은 것이다.


개성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북측 근로자./블룸버그


그러나 ‘개성공단의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남북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자 북한은 개성공단을 우리 측을 압박하는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은 남북 긴장 국면에서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 남측 기업과 근로자는 나가라”며 개성공단을 ‘인질’과 같이 활용했다.

이명박 정권 초기인 2008년 3월, 김하중 당시 통일부 장관이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 확대는 어렵다”는 발언을 문제 삼으며 남측 근로자의 철수와 개성관광 중단을 통보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실시되며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된 2009년에는 북한이 군 통신선을 차단하고 통행을 3차례 중단하기도 했다. 이어 현대아산 직원의 억류 사태가 터졌다. 현대아산 직원이었던 유성진씨는 136일간 북한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그러나 개성공단이 폐쇄된 적은 없다. 개성공단 폐쇄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우리 정부가 대북 제재 차원에서 진지하게 개성공단 폐쇄를 검토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오히려 북한이 입을 닫았다. 2010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 체류 인원을 줄였지만, 개성공단 생산은 계속 이어졌다.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개성공단이 사실상 북한 정권의 유일한 외화벌이 수단이라 쉽게 폐쇄를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현재 개성공단에는 123개 기업이 입주해있고, 여기에서 5만4000여명의 북한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지난 2004년 3월 개성공단이 가동된 이후 20억달러(약 2조2350원)에 이르는 제품이 생산됐고, 북한 노동자의 누적 임금은 3억달러다. 여기서 나오는 자금은 북한 정권의 유지와 개성공간 근로자를 포함해 인근 지역 주민, 최대 30만명에 이르는 근로자 부양가족의 생명줄이다.

그래서 개성공단은 남북 관계 최후의 연결 고리로 인식돼왔다. 북한 경제의 일부를 이끄는 개성공단을 폐쇄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러 안보 위험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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