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한 축’(1월 29일 부시 미 대통령 연두 국정연설)’,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1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성명).

최근 며칠 동안 미·북 양측이 쏟아낸 말과 표현만 보면, 미·북은 실질적인 교전을 앞둔 것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부시 대통령 연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첫 공식 대응이라고 할 수 있는 1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은 격한 언어들로 가득하다.

성명은 “역대 미국의 대통령이 직접 정책연설을 통해 주권국가인 우리나라에 이처럼 노골적인 침략위협을 가한 적이 없다”, “미국이 대화의 가면을 벗고 정세를 전쟁접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등으로 비난했다. 북한은 이어 “(군사적) 타격의 선택권이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무모한 군사적 압살기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전불사 의지마저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실질적 대결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부시 대통령이 자신들을 ‘악의 축’이라고 부른 상황에서, 북한도 체면상 강경한 언어들을 동원 맞대응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 당국자는 “부시의 잇따른 경고에 대한 ‘방어전적인 성명전’성격이 짙다”고 했다.

당국자들은 이처럼 북한 성명의 의미를 축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열되고 있는 ‘언어 전쟁’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인지를 선뜻 점칠 수 없는, 현 상황의 ‘예측불가능성’ 때문이다.

백진현 서울대 교수는 “이번 성명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현재 미·북관계 구도를 풀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서 “미국이 문제시하는 대량살상무기에 북한이 많이 걸려있는 상황이며, 이를 해결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는 단호하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들은 현 위기 상황이 풀리려면 북한이 일단 무조건 미국과의 대화에 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은 작년 6월 부시 대통령이 직접 “북한과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대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대화 재개 여부에 대한 선택은 북한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한·미 정부가 각종 유인책을 내놓고 대화하자고 하면 마지못해 나오는 모습을 취하곤 하던 북한의 태도를 감안할 때, 대화에 응해봐야 ‘핵·미사일·재래식 무기’ 문제같은 어려운 주문만 잔뜩 늘어놓을 부시 행정부 팀과 얼굴을 맞대려 할 것인지 의문이다.
/ 김인구기자 gink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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