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북한은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을 대의원 전원 찬성으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정권수립 이후 4반세기 동안 국가권력구조의 골격으로 유지돼온 내각제 형태의 수상제가 폐기되고 대통령 중심제와 유사한 주석제가 새로 출범했다.
남북한의 정치체제 변화가 같은 날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공교롭다. 유신체제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북한의 주석제가 조국통일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각각 명분으로 내세운 점도 흥미롭다.
북한은 새 헌법 채택에 앞서 1972년 10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5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에 대한 토의를 거쳐 토의된 헌법초안을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심의에 넘겼으며 이를 다시 당중앙위원회 제5기 6차 전원회의에서 최종 확정해 최고인민회의에 제출하는 절차를 밟았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토의는 국가적 중대사라 할지라도 당적 결정을 선행시키는 당국가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며,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심의는 전민족적 통일전선 조직체를 표방하는 조국전선으로부터 '민족적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의례적 조치였다.
북한이 1970년대 초 헌법을 개정해 주석제를 골간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권력구조를 탄생시킨 것은 1950년대 이후 권력투쟁을 겪으면서 부쩍 향상된 김일성의 지위와 역할을 반영하고 있다. 김일성은 50년대 초 남로당계 숙청으로 시작해 8월 종파사건과 1967년 갑산파 제거, 1969년 군부파 축출로 이어지는 일련의 권력투쟁을 통해 유일체제를 구축했으며 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이를 공식화했다. 주석제는 유일사상체계·수령제를 제도화하고 법적으로 고착화하는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이다.
주석제는 김정일 후계체제를 등장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다. 김정일 후계구도는 김일성이 회갑을 맞는 1972년을 기점으로 가시화되어 74년 2월 후계지명으로 구체화되는데 주석제가 나옴으로써 김일성은 국가를 맡고 김정일은 당을 매개로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역할분담이 가능해진 것이다.
대외적으로 보면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국제적인 화해분위기, 72년 2월 닉슨-주은래의 만남과 상해 코뮈니케로 상징되는 미-중 관계개선, 중-일접근, 남북대화 시작 등 일련의 국내외정세 변화와 그로부터 예상되는 외풍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내부 체제정비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