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만 재일교포의 대표 단체인 재일 민단(단장 김재숙)의 구심력이 급속한 쇠약 증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의 재가 아래 민단이 추진했던 ‘교포 통합은행’ 구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민단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의문마저 터져 나오고 있다.

추진했던 교포은행(은행명 ‘드래곤뱅크’)의 좌절은 민단 및 교포사회의 분열상이 여지없이 표출된 망신극으로 불린다. 한국 정부가 기획하고 민단이 나섰던 이 구상은 파산한 교포 신용조합을 대신해 ‘부실 제로(0)’의 깨끗한 새 민족은행을 만들자는 골격이었다.

그러나 2년 전 구상이 본격화된 이후 교포사회는 입장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는 내분을 겪어왔다. 통합은행의 주체를 놓고 처음부터 한신협(재일한국인 신용조합협회) 주류와 비주류가 격돌을 벌였으며, 여기에 제3의 은행 추진세력까지 가세함으로써 극도의 혼미상을 거듭해왔다.

한국 정부가 민단과 교포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드래곤뱅크’안(案)을 사실상의 공식 입장으로 정한 이후에도 분열은 수습되지 않았다. ‘민단 외에도, 유봉식(MK택시 오너) 그룹과 홋토·요코하마 상은 등이 저마다 주체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분오열 양상이었다.

결국 일본 당국이 실시한 파산 한국계 신용조합의 인수 입찰에 5개 교포 세력이 응찰,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벌이는 최악의 상황이 됐다. 입찰 결과 민단 주도의 ‘드래곤뱅크’는 한국 정부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 3곳의 입찰에서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민단 및 교포 지도부의 파벌 대립은 과거부터 문제가 돼왔으나 이번처럼 극명하게 표출된 예는 거의 없었다. 교포사회 일부에서는 “민단의 리더십이 한계에 달했음을 말해주는 사례”라고 지적하고 있다.

민단이 처해있는 상황은 안그래도 험난하다. 광복 이후 남북 대결 구도 속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며 교포사회를 이끌어 온 민단이지만, 교포의 세대교체와 가입자 감소가 가속화되면서 갈수록 존립기반이 약화되고 있다.

45만여 명의 민단 가입자 중 한국에서 태어난 1세대는 현재 5%에 불과하다. 한국말을 못하고, 모국을 모르는 3~4세대가 절반에 달하며, 이들은 민단 활동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매년 1만명 가까운 교포가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는 통계도 있다.

게다가 파산한 한국계 신용조합의 불법 사실이 일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써 민단으로 대표되는 교포사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도쿄상은 김성중 전 이사장이 32억엔 배임 혐의로 기소됐고, 최대의 교포 조합인 간사이고깅에도 수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위기를 느낀 민단도 정치성·민족성·폐쇄성을 줄이고 일본 내 생활단체로의 변신을 모색하는 등 새로운 존립방법을 찾느라 부산한 움직임이다. 민단 산하 21세기위원회는 최근 ‘일본 국적을 취득한 교포라도 민단 가입 자격을 부여하자’는 요지의 제안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동경=박정훈특파원 j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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