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지요타(千代田)구에 있는 조총련 중앙본부 건물.


뿌리째 흔들리는 조총련

작년 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핵심 인물인 허종만 부의장이 미국에 망명했다는 설이 도쿄에 파다하게 퍼졌다. 허 부의장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핵심 측근 인물. 한덕수. 작년 사망) 조총련 전 의장 당시부터 이미 실세로서 조총련 조직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허 부의장이 ‘미국 대사관에 직접 들어가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문도 소문이려니와 더 큰 ‘문제’는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일본내 관계자들 모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조총련 위기는 이제 그렇게 ‘상식’처럼 돼 버렸다.


1955년 조총련 출범 당시 조직과 관련된 인원은 8만3000명 정도였다. 지금은 그 절반 수준인 4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총련계 동포도 10만명 전후로 추정돼 민단계의 20% 수준이다. “북송 재일동포가 10만명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그 직계가족들만 남은 셈”이라고 공안당국 관계자는 설명했다.

망명설의 주인공 허종만은 ‘설(說)’이 도쿄를 떠돌던 시각, 도쿄 곳곳의 조총련 지부를 돌아다니며 “조직이 어렵다, 모두 단결해야 한다”며 조직강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조총련 중앙본부가 올해 내건 슬로건 ‘모든 일꾼들이 동포들 속에 들어가자!’라는 구호 역시 이런 조총련의 위기 상황이 투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따가운 시선

쇠퇴의 길을 걷던 조총련에, 최근 총련계 금융기관인 ‘조긴(朝銀)’의 부정에 대한 일본 당국의 수사는 결정타다. 최근 2~3년간 잇따라 파산한 총련계 신용조합의 부실 대출을 수사중인 일본 당국은 수천억원의 돈이 부정한 방법으로 조총련에 흘러들어간 사실을 속속 밝혀냈다.

조총련 재정국장을 지낸 강영관씨를 비롯, 도쿄와 고베(神戶), 교토(京都)의 신용조합 고위관계자들을 구속했다. 사실상 외교공관으로서 면책특권을 누려왔던 조총련본부에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은 사실상 북한과의 ‘관계단절 선언’이었다. 일본 여론은 일제히 총련 자금의 북한 유입설을 기정사실화하며 조총련을 ‘범죄집단’처럼 몰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 말 괴선박 사건이 터졌다. 이어 마약을 실은 중국배 선원들을 조사한 결과 “북한으로부터 받았다”는 진술도 나왔다. 일본 정부가 그동안 북한에 보여줬던 일부 배려는 이제 그나마 완전히 사그라졌다. 일본 국민들 역시 ‘북한’이라는 말만으로도 혐오감을 보일 정도의 상황이다. 조총련계 동포들은 금융기관의 완전 파탄과 일본인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변화 강요받는 조총련계

조총련계 동포들의 급격한 한국 국적으로의 전환은 최근엔 상당히 줄어든 추세다. 이에 대해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이미 전향할 사람들은 다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대신 일본 정부 공안관계자는 “최근 일본으로 귀화 신청을 하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조선적(북한 국적)인 사람들”이라며 “(북송) 가족들 때문에 한국 국적을 얻을 수는 없어 일본 국적을 얻으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총련 조직은 부정하고 있지만, 북한의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일본내 조총련에 대한 비난이 높아가면서 ‘수령님’ ‘장군님’만 바라볼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도쿄에서 한국식 야키니쿠(고기 구이 가게)를 운영하는 한 총련계 동포는 “메뉴판이나 벽에 적혀 있던 ‘조선풍’을 지워버릴 생각”이라며 “그렇다고 남조선식으로 할 수는 없고, 일본 사람들 취향에 맞춰볼까 한다”고 말했다.
/동경=권대열특파원 dy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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