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사상과 이념, 정치적 이해관계와 노선을 달리 하는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한 박헌영의 재건공산당(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의 간판아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45년 9월 소련군정의 강력한 후견을 받는 김일성이 입북해 새로운 정치세력의 한 축을 형성함으로써 기존 정치판도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김일성은 입북과 함께 각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한편 38선 이북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함으로써 파란을 몰고 왔다.

그러나 소련군정의 의지를 반영한 그의 요구는 때 이른 반대에 부딪쳐 난항을 겪게 된다. 박헌영을 따르는 토착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엄연히 당중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북에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은 분파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당사자인 박헌영과 김일성의 직접 담판을 통해 해결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절충안으로서 "서울의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서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는 데 합의했다. 지루한 격론 끝에 나온 이 합의는 타협안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김일성과 소련군정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합의에 따라 1945년 10월 10일부터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비공개로 열리고 대회 마지막 날인 13일 당초의 합의대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분국)이 설립된다. 대회에서는 분국 지도기관을 선출, 책임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국내파의 오기섭과 연안파의 김무정을 각각 선임했다. 또 집행위원회와 각 집행부서장도 선임했는데 김일성은 측근인 안길과 함께 17인 집행위원회의 일원에 포함되는데 그쳤다.

김일성이 어렵사리 분국 설치를 성사시켜 놓고도 정착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지위가 확고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일성이 분국 책임비서에 오른 것은 두 달 뒤 열린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이다. 김용범이 책임비서로 추대된 것은 광복 전후 평양에서 기반을 닦아 국내파로 분류될 수 있지만 특정 정파에 기울지 않은 데다 소련군정의 의중을 잘 읽고 처신해줄 인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나중에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된 뒤 연안파가 주축이 된 조선신민당과 통합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변신하며, 북로당은 다시 남한내 좌파 3당의 통합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과 합당, 조선노동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분국은 조선노동당의 모체인 셈이다. 조선노동당이 창당기념일을 1945년 10월 10일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북한이 내놓고 있는 공식 문헌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라는 명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라는 용어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김일성이 과거 '미제 고용간첩' 박헌영의 수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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