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철

나는 평북 신의주의 한 고등중학교(6년제)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교사 생활을 하며 두 해 제자들을 졸업시켰다. 북한에서는 책임 학급담임제라고 해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졸업 때까지 담임을 맡게 된다. 선생도 학생도 정이 들 대로 들어 혈육처럼 친근해진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배급이 없었던 90년대 중반부터 내가 담임한 학급에서도 결석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여학생이 며칠이고 학교에 나오지 않아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 보았지만 그의 오빠가 다 쫓아버리면서 동생은 학교에 안 나간다고 선생님께 전해달라고 했단다. 그 여학생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오빠, 동생 넷이서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용기를 내서 집으로 찾아가 보았다.

들어서는 순간 냉기와 함께 가축우리에서 나는 듯한 메케한 냄새에 잠시 발길을 멈춰야 했다. 컴컴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부엌을 거쳐 겨우 어림짐작으로 방문을 열었다. 온기가 다행히 남아있는 아래목에 열살짜리 여동생이 누워 잠자고 있었고, 허리디스크로 일어나지 못한다는 학생의 어머니는 엎드려서 어디서 얻어온 듯한 콩부스러기를 골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괜히 왔다는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담임선생님이 왔다고 황송해 어쩔 줄 모르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오빠는 땔감을 마련하러 나갔고, 내 학생은 벼이삭을 주우러 멀리 농촌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살기 힘들다고, 어린 자식들이 나가 먹을 것과 땔 것을 구해 온다고, 부모 구실 못해 죽고 싶은 생각을 몇 번씩 하다가도 잘 때는 품을 파고 드는 새끼들 때문에 오늘까지 살고 있다고...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렵게 부엌 구경 승낙을 받아 구석구석을 살펴 보면서 또 한번 가슴이 아팠다. 작은 쇠가마 뚜껑을 열어보니 시래기 같기도 우거지 같기도 한 풀더미 위에 밤알 크기의 밀가루 덩어리가 군데군데 보였고 국물은 희뿌연 것이 아무리 봐도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찬장에는 사발 몇 개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한쪽 켠에 유일한 조미료인 소금덩어리가 보였을 뿐이었다.

교실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그 친구를 어떻게 도울 것인지 아이디어를 내게 했다. 며칠 뒤 학부형들에게 호소하여 30kg 정도의 밀가루와 얼마 정도의 쌀을 모았고, 내 몫으로 나오는 석탄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반에는 온갖 가구를 갖추어 놓고 번듯하게 사는 집안의 학생도 있었다. 가끔씩 초대받아 가면 커피나 고급 담배를 대접받기도 했다. 똑 같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당 간부와 일반 주민의 차이가 이토록 심하고 평등하지 못한 것에 속이 아렸다. 권력자는 과한 부를 누리고, 약자들은 굶어죽기까지 해야 하는 북한의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했던 것이다. 사회인이 되어 살고 있을 그 여린 여학생이 무거운 생존의 부담에서 이제는 벗어났기를 기대해 본다.

/99년 탈북, (주)베스텔인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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