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이후 미국 의회 의원들의 잇단 초청에 미국 방문의사를 강하게 밝혀온 황장엽씨가 최근 갑자기 "지금은 미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말해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입장변화에 대해 국민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한국에 온 후 '선비적 양심'을 일관되게 지켜왔고 '미국행'에 대한 그의 논리도 국민들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황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 수령독재체제에 대한 자신의 증언이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북한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으며, 9·11테러 이후에는 자신의 증언이 북한과 협상하는데 '탁월한 소재'가 될 수 있다면서 북한 화생방무기에 대한 모종의 증언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정부가 그의 미국행을 계속 반대하자 「중대한 결단」을 내리겠다는 말로 강한 의욕을 보이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가 며칠 전 미 의회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까지 다한 이야기를 또 하러 미국 갈 필요가 있나?"라고 말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 그의 말처럼 미국에 가도 새삼스럽게 할 말이 없기 때문일까. 무엇이 그의 심경을 바뀌게 했을까? 목숨을 걸고 사지를 탈출한 황씨의 신념과 용기는 어디 간 것일까? 다른 외부적인 작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래도 황씨이기에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사람은 허탈한 심정이다.

그동안 그의 행적을 돌아보면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국정원이 그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며 일일이 간섭하는데 그가 반발하자 국정원은 '신변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며 그를 국정원 '안가(安家)'에서 쫓아내려고 했었다. 또 그의 미국 방문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정원이 여러 가지 유형 무형의 압력을 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그가 죽고 싶다는 말까지 했을까?

일련의 황씨문제 전개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갖는 본질적인 의문은 왜 정부가 황씨의 미국행을 저지하기 위해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가 하는 점이다. 황씨의 증언이 우리 국익이나 미국과의 관계에 나쁠 것이 없는데도 정부가 그의 미국방문 이야기만 나오면 정상이 아닐 정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국민은 알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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