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장·hhkim@chosun.com

6·15남북공동선언의 빛이 바래고 있다.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지배적 규범으로서의 실천력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자칫 현 정부와 다음 정권에까지 부담으로 작용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북한당국이 근자에 와서 공동선언의 정신은 물론 핵심적인 합의내용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의 국영 언론들은 6·15선언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한」(제2항) 것을 놓고 「남북이 연방제안에 합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작년 12월 노동신문이 『북남공동선언의 이행은 곧 조국통일』이라면서 『북남공동선언은 연방제 방식의 통일을 지향함으로써…』라고 주장하더니, 새해 들어서는 평양방송이 『(6·15선언은) 북과 남이 연방제 통일을 지향해 나갈 것을 유일 방도로 밝힌 것』이라느니 『북남공동선언이 연방제 통일을 명시함으로써…』 등의 단정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북한 당국이 이산가족 상봉, 각 분야의 교류 협력, 당국간 대화, 김정일 답방 등 6·15선언의 구체적 실천조항들은 모조리 외면하면서도 연일 「공동선언의 이행」을 우리 측에 촉구하고 있는 것도 이 「통일조항」과 관련된 것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태도다. 북한의 이런 주장에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다. 한 핵심당국자는 『저들이 늘 하는 이야기 아니냐. 크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면서 『북한당국이 6·15선언을 훼손할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북한당국의 의사를 정확히 대변하는 관영매체들이 『남북 정상이 연방제 합의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데도 우리 정부가 『신경쓸 것 없다』고 반응하는 데 그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비슷한 경우 북한은 달랐다. 김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양해했다』고 이야기했을 때 북한은 즉각 노동신문 등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이를 간접적으로 뒤집었다.

물론 북한당국의 일방적인 주장에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남쪽이 연방제에 합의했다」는 북한의 반복된 주장은 결코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다. 이는 6·15공동선언의 기저를 뒤흔들 뿐 아니라 앞으로 남북관계를 어디로 몰고 갈지 모를 잠재적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다.

6·15정상회담 이후 우리 정부는 「연합제」와 「연방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갈등의 소지가 있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그 밖의 합의사항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는 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며 선동적으로 해석권을 선점하고 나선 이상 우리로서도 더이상 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남북간의 역사적인 합의나 선언은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7·4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는 불과 1년도 안돼 사실상 무력화됐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의 문건이 되고 나서도 거기에 담긴 정신이나 선언적 내용은 항상 남북관계에서 어떤 참조(reference)가 되는 기능을 해 왔다.

6·15공동선언 역시 현 정부와 함께 운명을 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일의 방향을 선언적으로 천명한 내용은 정권을 이어가며 남북관계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칠 것이다. 북한당국이 남쪽의 다음 정권에 대고 『이전 정권이 연방제에 합의했다』고 고집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현 정부가 당장의 남북관계 악화를 우려해 북한의 주장을 어물쩍 외면한다면 6·15공동선언은 다음 정권이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데 첫 시련이 될 수도 있다. 현 정부는 물러나기 전에 협상 당사자로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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