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중심 권력구조 반발세력 철퇴, 수령체제 뿌리내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4차 당대회(61.9) 이후 부쩍 향상된 김일성의 당내 지위에 발맞춰 김일성 개인숭배운동이 다시금 확산되기 시작했다. 개인숭배의 물결은 50년대 말 종파투쟁을 거치면서 반김일성파의 견제가 사라진 후 탄력을 받으며 급류를 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60년대 초반부터 북한 지도부내 일각에서 김일성 개인숭배운동을 거스르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외부적으로 중-소분쟁이 격화되고 베트남전쟁이 확전되는 등의 국제적인 긴장국면과,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빚어진 북-중관계의 급속한 냉각 등에 편승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일성 지도부는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와 당중앙위원회 제4기14전원회의를 잇달아 열고 당조직의 대수술을 단행했다. 당중앙위원회 위원장·부위원장 직제를 당중앙위원회 총비서·비서 체제로 개편했으며, 당사업을 일상적으로 조직집행하는 기구로서 비서국을 신설한 것이다.

종래 외형상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견지했던 권력구도를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전환한 이 같은 조치는 60년대 들어 강화된 김일성의 권력기반을 제도화하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내부단속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권력구조 개편으로 인해 당권의 핵심으로부터 소외된 세력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반개인숭배 흐름과 맞물리면서 결국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갑산파 숙청사건이다.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의 「종파주의·기회주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경고로 배태되기 시작한 사건은 67년 5월 초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기15차 전원회의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 겸 조직담당 비서 박금철, 정치위원 겸 대남담당 비서 이효순, 사상담당 비서 김도만, 국제부장 박용국, 과학교육부장 허석선 등 고위 인사들이 무더기로 종파주의자·가족주의자·지방주의자라는 비판의 뭇매를 맞고 일거에 중앙권력무대에서 퇴출당했다. 이 사건이 갑산파 숙청사건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30년대 중반 함북(현재 양강도) 갑산지방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항일지하조직 「갑산공작준비위원회」 출신과 그 추종자, 즉 갑산파가 대거 된서리를 맞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갑산파 숙청를 주도했던 인물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으로 있으면서 권력핵심으로의 도약을 꿈꾸며 야심을 불태우고 있던 김정일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사건의 막전막후에서 준비·집행·처리까지 담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여세를 몰아 훗날 후계자의 지위에까지 올라서게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갑산파 숙청은 북한 사회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로 변모하는 질적 변화의 계기로 작용했다. 당중앙위원회 제4기15차 전원회의 이후 모든 권력이 김일성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김일성의 권위가 절대화되는 유일사상체계가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른바 수령체제가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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