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 군인들에 의한 민폐가 심해지자 군민일치운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주민들이 무리배치(집단배치)되어 생산현장으로 떠나는 제대군인을 환송하는 모습.


=군에 입대하면 군단 또는 사단의 신병훈련소에서 2∼3개월의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된다. 남한에서는 훈련소에 들어가면 바로 군번을 받고 군인이 되지만 인민군에서는 훈련을 마치고 군인선서를 해야 비로소 정식 군인이 된다.

=자대에 배치 받으면 길고 긴 병영생활이 시작된다. 병영생활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과정의 연속이지만 졸병 시절은 더욱 고달프다. 훈련과 교육, 작업 등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나날의 연속이고, 여기에 소대 내 온갖 궂은 일은 모두 졸병들 몫이다 보니 자기 자신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다. 병영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했졌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3∼4년은 지나야 한다.

=인민군의 병실(내부반)생활은 일과표에 따라 이루어진다. 저녁 식사 후에 훈련이 없으면 대개 분대단위로 일과총화와 '전투력강화 5대방침'·'군무강화 10대준수사항' 등 군사규정이나'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등을 암송한다. 그러고 나면 중대 청년동맹 비서 주관으로 침상에 둘러앉아 약 45분 간 '군중문화오락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에는 ▲번호맞추기 ▲지명 노래하기 ▲시 낭송 등 여러 가지 오락으로 그 날의 피로를 푸는데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되풀이 되다보니 노는 것도 지겨워진다.

=5∼6년이 넘어서고 나름대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입당(入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북한에서는 제대 후 사회에 나가 지도원(초급간부)이라도 하려면 입당이 필수적이다. 과거에는 "입대해 입당 못하면 개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의가 입당했다. 90년대 초부터 폰트(할당량)가 크게 줄어 입당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됐다. 심지어 '입당고민'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입당하기 위해서는 대열참모(인사참모)나 정치지도원에게 잘 보여야 한다.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식량조절(자기 몫을 일부 떼어 모으는 것)을 하거나 발싸개(양말대용의 천으로 아이들 기저귀용으로 그만이다) 등을 모아 바치는 방법이 많이 애용된다.

=고위층 자녀이거나 집안형편이 괜찮은 병사들은 집에 얘기해 상관들의 민원을 해결해주거나 자녀 혼수품 등을 마련해주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입당문제가 해결되면 일부는 군관학교나 대학 진학을 노린다. 특히 농촌이나 광산·탄광 출신 병사들은 제대 후 무리배치(집단배치)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의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게 되므로 이를 회피하기 위해 군관학교나 대학 진학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대학을 나오면 하다 못해 공장·기업소 중간간부나 협동농장의 작업반장 이상을 할 수 있다. 군관학교나 대학 진학은 입당보다 더 어렵다. 부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중대에서 2∼3명 정도가 진학하는데 청년동맹 비서나 사관장(특무상사)쯤 돼야 가능하다.

= 김일성 사망 후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사회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었지만 군에서는 한동안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 이따금씩 작전을 나가거나 공사에 투입돼 민간인들 만날 수 있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다.

= 90년대 초 우연히 집(황북 봉산)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여동생이 찢어진 신발을 신은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군에서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 특히 좋지 않은 일은 절대로 얘기해 주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모른다.

= 94년 경 인민군 부대에 후방물자(부식물)를 자체로 해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뭔가 나라 사정이 좋지 않은가 보다 생각했다.

= 이 무렵 각 중대마다 '위생중대'라는 것이 생겼다. 병사들이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앓거나 죽고, 탈영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몸무게 45kg 이하의 영실동무(영양실조 동무)들만 모아'위생중대'를 편성했다. 이들에게는 배급량을 늘리고 고기와 기름을 주어 영양보충을 한 다음 자기 부대로 돌려보낸다. 위생중대 병사들은 멀리서 봐도 허약한 모습이 완연한데 대오를 지어 식당을 오갈 때마다 "보라, 우리를 보라 … "라는 후렴구가 붙은 노래('우리를 보라')를 부르고 다녀 실소를 자아내곤 했다.

=중대에 영실동무가 생기면 중대장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중대장이 자기 집에 데려가 먹이거나 대대장에게 얘기해 휴가를 보내 영양보충을 하고 돌아오게 조치하기도 했다.

=군인들이 배를 곯으면서 무엇보다도 민폐가 극심해졌다. 주변의 민가를 급습해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약탈해오다시피 한 것이다. 군인들에 의한 민폐가 통제불능상태에 이르자 주민들이 땅을 파 지하에 돼지우리를 만들고 그 위에 쇠창살로 지붕을 덮은 다음 자물쇠를 채우는 자구책을 쓰기도 했다. 군민관계가 악화되자 당국에서는 군민일치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남한과 외부세계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워낙 당국이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데다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통해 북한 사회주의 우월성을 주입시키기 때문이다. 아마 바깥세계에 대한 정보로부터 가장 소외된 집단이 인민군대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사람이 굶어주는 상황에서도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북한이 선군정치를 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민군이 체제유지의 최후 보루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급 군관(장교)들은 사정이 다르겠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남한이 못 먹고 못 산다고 알고 있다. 비무장지대(DMZ) 근무 때 남쪽에서 세운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미국 대통령 생일인가보다 생각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크리스마스가 뭔지 잘 모른다.

=북한에서 휴전선 확성기 방송을 통해 월북하면 컬러TV를 준다고 선전하곤 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남한에 와서 집집마다 컬러TV가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북한에서는 컬러TV 한 대면 '노력영웅'칭호 받는 것에 버금간다.

=황해도와 강원도 등 휴전선이 가까운 군부대에서는 가끔씩 남한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 삐라와 매개물(물품)이 떨어지는데 그것을 보고 내가 알고 있는 남한사회가 전부는 아니구나 하는 의문을 가졌다.

=삐라와 매개물은 발견 즉시 상부에 바치게 돼 있지만 최근에는 매개물 가운데 볼펜이나 일회용 라이터, 수첩 등은 한글로 된 글자만 지우고 그냥 쓴다. 영어로 쓰인 글자는 외국산이라고 하면 그냥 넘어간다. 매개물 가운데 불량품은 교환해준다거나 문제가 있으면 소비자보호원에 알리라는 문구를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낮에는 끊임없는 자동차들의 움직임, 밤에는 대낮처럼 환하게 켜놓은 전등불이 눈에 들어와 속으로 남한의 경제력이 결코 낮지 않구나 생각했다. 밤에 앞(남쪽)을 보고 있다가 뒤(북쪽)를 돌아보면 불빛 하나 없는 암흑 그 자체다.

=경제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지켜야 한다고 의식이 군대 내에 팽배해 있다. 역시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통제와 끊임없는 사상교육의 결과이다.

=소련·동구 붕괴 직후인 92년께 군단 부사령관·참모장급 인사 48명이 현지와 중국을 둘러보고 와서 각 부대를 돌며 경험담을 얘기하고 다녔다. 그들은 "소련·동구에서 전공자들이 훈장 가지고 빵과 바꿔 먹더라", "사회주의가 무너지면 군대도 다 망한다", "중국에 가니 화장실에서 돈을 받더라"등으로 개혁·개방 무용론과 체제유지 필요성을 적극 홍보했다.

=군인들은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잘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통일이 되면 "드넓은 호남벌에서 쌀이 많이 나므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 병사들도 있다.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남한에서 미군이 나가야 하는데 미군이 있는 이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에 대해서는 누가 이기든 한판 붙자고 생각하는 군인들이 많다. 환경이 열악한데다 오랜 군대생활에 지쳐 전쟁이라도 나서 지긋지긋한 군대생활이 끝났으면 한다.

=병사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이 이긴다고 생각한다. 당국이 부단히 이런 교육을 시키기 때문이다. 또 당국은 평소 "우리는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고급 군관들 중에는 북한이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리=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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