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반세기 집권사 최대 위기..반격 부딪혀 오히려 철퇴

김일성 집권사에서 최대 위기로 일컬어지는 권력투쟁 사건은 「8월 종파사건」이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분출된 사건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사건의 발단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비판의 포문을 연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56.2)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폭정과 개인숭배 등을 집중 공격했고 이는 공산권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 스탈린의 지도노선에 충실했던 북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권력핵심에서 소외돼 있던 부수상 최창익을 비롯한 연안파와 부수상 박창옥 등 소련파 잔존 세력들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당지도부의 독주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세력을 규합해 김일성의 지도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반(反)김일성 연합전선에는 부수상 최창익과 상업상 윤공흠, 직총위원장 서휘 등 연안파가 선봉에 섰고, 부수상 박창옥을 비롯한 소련파 일부가 가세했다. 이들은 평양주재 소련·중국대사관에도 거사계획을 귀띔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연고가 있는 군부에도 선을 대는 등 구체적으로 움직임을 진척시켜 나갔다.

이 즈음 북한은 전후 복구 이후 5개년 계획(57∼60년)을 추진하면서 외부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10여명의 각료급 인사를 대동하고 56년 6월 1일부터 약 50일간 소련과 동유럽 순방 길에 올랐는데 김일성의 장기 외유는 이들에게 더 없이 귀중한 호기였다.

그러나 사건은 계획단계에서 기밀이 누설돼 김일성 주류의 조직적인 반격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다. 평양으로부터 급보를 전해 듣고 급거 귀환한 김일성은 7월 말로 예정됐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무기 연기시켜 가며 대책마련에 들어갔으며 준비가 끝나자 56년 8월 말 회의를 소집했다. 8월 종파사건의 막이 오른 것이다.

평양의 내각 회의실에서 열린 전원회의는 김일성의 소련·동구 방문 결과보고를 듣고 서둘러 일반 토의에 들어갔다. 먼저 연단에 올라온 상업상 윤공흠이 의제에 없던 당내 민주주의 부재와 개인숭배를 거론하며 김일성 지도부를 성토하고 나섰다. 그러자 회의장 곳곳에 포진하고 있던 김일성 추종세력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발언을 중단하라며 아우성을 쳤고 회의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사태가 여의치 않음을 직감한 윤공흠, 서휘, 이필규 등 거사의 주역들은 즉시 차를 타고 의주 방면으로 도주,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해 버렸고, 속개된 오후 회의에서 김일성과 그를 따르는 세력들은 최창익과 박창옥 등 주모자들은 출당, 철직(해임)시켜 버렸다.

이후 소련과 중국이 즉각 개입해 반김 세력에 대한 출당·철직 조치를 취소하고 이들 모두 복당시켰으나 임기응변의 조치에 불과했다. 김일성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반대파 척결과 이들의 여독청산 작업을 추진해 50년대 말까지 북한 사회는 사상투쟁으로 꽁꽁 얼어붙었다.

이 사건은 김일성 반세기 집권사에서 최대 위기로 기록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1인지배체제를 가속시키는 계기가 됐다. 반대파의 입장에서는 상대를 과소 평가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지도체제의 변화를 모색했다가 철퇴를 맞은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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